인간이 자신을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은 진실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별 두려움과 고민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이 평안하겠지만, 그러나 조금이라도 양심이 살아있다면 그 영혼이 예민하다면, 우리는 모두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에 다다를 수 없다는 그 절박함에 우리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중세에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바로 그런 떨림이었다. 신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죄성, 가치 없어보이는 우리의 인생.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그들에게는, 인생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으로의 칭의를 주장했다. 인간이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현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로움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심으로,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그 의로움은 쉽게 이야기해서, 얀시의 말을 빌리자면, 그분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더 이상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개혁주의 안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는 파트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 처럼, 단순히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정도의 역할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의로운 일들을 행하셨고, 그 의로운 일들을 믿음으로 내 것이 되게 하셨다. 어떤 신학자들은 루터의 하나님의 칭의야 말로 악한 것이라 비난한다. 어떻게 인간이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떻게 인간이 하지도 않은 것을 하나님이 했다고 인정해주실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믿는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완전을 주셨음을,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그 완전 안에 걸어가고 있음을, 그리고 바로 그 복음이 비천한 우리 마음가운데 그를 향한 사랑을 터져나오게 한다는 것을, 우리의 인생이 비참하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고, 단 한 순간도 믿을 수 없을지라도, 나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주신 그분의 사랑은, 나에게 완벽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그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며 구원을 향한 보증이 되신다고,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셨다. 그분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나라로 인도해 가신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늘도 내 인생 가운데 단 하나의 오류도 없다. 오직 그분의 뜻 안에서 마땅히 일어날 것이 일어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분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나와 내 인생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이다.
2012년 1월 6일 금요일
인간이 자신을 믿을 수 있는가? / 너에게 간다 - 윤종신
인간이 자신을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은 진실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별 두려움과 고민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이 평안하겠지만, 그러나 조금이라도 양심이 살아있다면 그 영혼이 예민하다면, 우리는 모두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에 다다를 수 없다는 그 절박함에 우리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중세에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바로 그런 떨림이었다. 신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죄성, 가치 없어보이는 우리의 인생.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그들에게는, 인생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으로의 칭의를 주장했다. 인간이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현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로움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심으로,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그 의로움은 쉽게 이야기해서, 얀시의 말을 빌리자면, 그분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더 이상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개혁주의 안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는 파트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 처럼, 단순히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정도의 역할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의로운 일들을 행하셨고, 그 의로운 일들을 믿음으로 내 것이 되게 하셨다. 어떤 신학자들은 루터의 하나님의 칭의야 말로 악한 것이라 비난한다. 어떻게 인간이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떻게 인간이 하지도 않은 것을 하나님이 했다고 인정해주실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믿는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완전을 주셨음을,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그 완전 안에 걸어가고 있음을, 그리고 바로 그 복음이 비천한 우리 마음가운데 그를 향한 사랑을 터져나오게 한다는 것을, 우리의 인생이 비참하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고, 단 한 순간도 믿을 수 없을지라도, 나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주신 그분의 사랑은, 나에게 완벽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그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며 구원을 향한 보증이 되신다고,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셨다. 그분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나라로 인도해 가신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늘도 내 인생 가운데 단 하나의 오류도 없다. 오직 그분의 뜻 안에서 마땅히 일어날 것이 일어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분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나와 내 인생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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