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삼 목사님을 처음 뵌 것은, 칼빈에서 공부하던 시절입니다. 한인 학생회의 특강 강사로 오셔서 강의해주셨습니다. 그 때 한목사님의
설교와 강의를 들으면서 느낀 것은, "치밀하면서 동시에 따뜻하다" 라는 것입니다. 충분히 성경적으로 설교하시지만, 그러나 그것이 굉장히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저 "성경의 주해"로 그치는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 속에 살아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강한 확신을 주었습니다. 모든 설교자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의 10년만에
우연히 제가 섬기는 교회에 강사로 오셨습니다. 한번의 설교와 한번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거의 변하지 않은 외모가 참 놀라웠고, 여전히 따뜻하고 치밀한 그분의
설교와 강의가 참 좋았습니다.
특별히 인상에 남은 것은, 성경에서 나온 원리들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회중이 믿음으로 붙들고 적용하고 실천하도록 강하게 계속적으로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있는 분은 아니지만, 10년 전 보다 더 탁월해지셨다고 느꼈습니다.
한 목사님의끊임 없는 정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적이고 목회적인 너무나 탁월한 설교였고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설교 후 특강의 제목은, "위기를 이기는 제자훈련의 세가지 타입 (딤후 2:3-7)" 이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 평생에 마음에 새겨두고 붙들어야 할 목회 비전으로서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하의 내용은, 한규삼 목사님의 강의,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저의 목회적인 이해와 적용입니다.
* "위기를
이기는 제자 훈련의 세가지 타입"
팬데믹 시간을 지나면서 모든 교회들이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신뢰도 역시 너무나 크게 낮어진 상황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교회가 세상 보다 더 앞서 가는 곳이었고 세상에 나눠 주었지만, 이제는 세상이 오히려 교회보다 더 많은 자원을 가진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교회가 공공선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지원하고 물밑에서 이끌어나가는 것을 교회의 목표로 잡아야 합니다. 비록 세상의 역량이 더 크다 하더라도, 교회는 포기하지 말고 노골적이지
않은 은근한 복음 전파의 의도를 가지고 계속적인 구제를 해야 합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계속되는 교회를 향한
요구는, 신앙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주의입니다. 이러한 현 시대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신앙의 터전을 "교회 안에만" 두지 말고, 세상으로 성도 한명 한명이 스며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금"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서, "모든 성도의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의 배경은, 바울 사도가 감옥에 있는 배경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를 통해서 바울이 얻은 소식은, 오히려 교회는 활력을 얻고 신앙은 견고하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교회의 소식을 듣고 앞으로의 교회의 방향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디모데후서 2장에 기록된 훈련의 내용입니다.
1. 병사 훈련 (절대 위기의 순간에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 단기)
딤후 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3 Take your share of suffering
as a good soldier of Christ Jesus. 2: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4 No one in military service
gets entangled in matters of everyday life; otherwise he will not please the
one who recruited him.
첫 번째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훈련은, "병사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전투를 위해서 하는 훈련입니다. 이 모델은, 내 삶 속에서 절대 위기가 찾아오고 안정적인 삶이 흔들릴 때에 사용하는 훈련입니다. 보통 병사가 실제 전쟁 속에서 딱 한가지의 훈련이 생각나고 그것으로 싸우는 것 처럼, 이것이 바로 그 절체 절명의 순간에 사용해야 하는 훈련의 내용입니다.
삶 속에서 모든 것이 작동하지 않을 때에, "나를 병사로 모집한 주님을 기쁘시게 하자"라는 한가지 생각만 붙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위기가 닥쳐왔을 때에 (ex) 경제적 위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력이 전혀 소용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날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에 전념할 때"에 병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운동 선수 훈련 (나의 영적 수준을 계속 업그레이드하는 헌신 / 중기)
딤후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5 Also, if anyone competes as an athlete, he will not be crowned as the winner unless he competes according to the rules.
두번째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훈련은, "운동 선수 훈련" 입니다.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이라는 라는 말씀은, 언뜻 보면 규정대로 하지 않으면 실격한다 라는 의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문화적인 맥락에서 보면, 로마 헬라 세계에서 열렸던 다섯 개 정도의 전국 체전을 배경으로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은 제우스 신 앞에서, 10개월 동안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서 시합에 임하겠다는 서약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법대로 경기한다"라는 것이 훈련이라고 말한다면, 이 훈련은 "시합에 나가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최대한의 능력을 끌어 올린다는 훈련"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여서 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훈련의 방식은 다양합니다. 단순히 지적인 훈련 뿐만 아니라, "기도, 예배, 성경 읽기 등의 다양한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교회에서 가능하면 소그룹으로 묶어서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을 위해서 교회에서는 훈련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입니다.
3. 농부 훈련 (하나님께 인생이 달렸음을 인정하는 긴 여정 / 장기)
딤후 2: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6 The farmer who works hard ought to have the first share of the crops.
세 번째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훈련은, "농부 훈련" 입니다. 이것은 긴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훈련입니다. 농부 훈련은 쉬워 보이지만,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농부는 자신이 농사를 짓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만, 하나님께서 비와 다른 모든 조건을 통해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하지만, 하나님이 축복하셔야 일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농부 훈련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한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명예로운 것이며, 내가 수고한 것을 빼앗기는 것이 수치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수고해서 돈을 버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하며, 이 사실 때문에 우리의 감사의 지경이 넓어져야 합니다. 길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농부 훈련입니다.
4. 총명 (세가지 훈련을 통해 얻는 결과)
딤후 2: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개역개정) 7 Think about what I am saying and the Lord will give you understanding of all this. (NET)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가지 훈련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총명"입니다. 이것은 세가지를 포함하는데, 먼저 "돌파력" 입니다. 돌파력은, 훈련을 통해서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에 그것을 뚫고 나가는 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해력" 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상관 없는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오묘하게 일하시며, 그것들을 만나게 하시는 자리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어우러짐"입니다. 이것이 특별히 중요한데, 총명으로 번역되는 우리 말 단어 가운데, 영어로 미학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우러짐"을 의미합니다. 총명은 "온 교회가 행복해지는 것"이며, "필요한 말과 필요한 행동, 적절한 말과 적절한 행동을 공동체 가운데 하는 것"이 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훈련은, 단순히 어떤 과정을 수료하거나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를 세우고 총명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 저의 목회 비전으로서의 적용
목회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목회는 정말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행정, 예배, 심방 등등 영적인 일 뿐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회 생활의 모든 것이 그 안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목회의 핵심은, "사람을 세우는 것" 입니다. 물론 이것을 위해서,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훈련의 방법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도 한명이 자신의 삶의 역량을 키우고,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한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훈련은, 실천의 면이 당연히 중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바탕"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인 탄탄한 배경 없이 그저 열심히 훈련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표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아주 적은 부류의 천재들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천재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더 높은 차원에서 어떤 현상과 사물을 이해하는 사람이며, 단순히 남의 것을 인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비전을 따라서 자신의 이해를 통합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한목사님이 바로 이 영역에 속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한 목사님이 제시하시는 "훈련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결과에 대한 이해"는 가장 수준 높은 차원에서 흠잡을 데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한목사님의 제자 훈련의 타입을, "단기, 중기, 장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 세가지 훈련이 서로 교차하는 복합적이지만, 굳이 나누자면 편의상 이렇게 나눌 수 있겠습니다.
* 위기 속에서 "가장 우선 순위"로 놓아야 하는 것
먼저
"단기인 병사 훈련"은, 짧은
순간에 찾아온 삶의 아주 극단적인 위기 속에서 성도가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 가를 가장 확실하게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펜데믹으로 여전히 일상이 무너진 이 시기에,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훈련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아무리 평소에 신앙이 좋아보이는 사람도, "자신의 삶의 근간이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는
정말 어려운 시간을 지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위기의 상황 속에서는, "정신"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자신이 그동안 의지했던 모든 것이 다 물거품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대한 혼란 속에서, "삶의 우선 순위"가 완전히 무너지게 됩니다.
바로 그 때에,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한다"라는 "가장 상위의 비전 혹은 소명"을 붙들라는 것은
너무나 탁월한 전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인 빅토르 프랑클이 주장한 것처럼, 삶의
가장 극단적인 순간에서, 어떤 희망이라도 한가지를 반드시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흔들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 "그분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그 비전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에 바로 이 훈련에 임하는 것이야 말로 위기를 벗어나는 최고의 전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흔들리고 무너져도, "궁극적인 성도의 비전"인 이것은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안정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 자신에게 바로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 훈련은 "성경적"이다
"중기 훈련인 운동 선수 훈련"은, 교회 안에서 항상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 사실 훈련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더 부유해지기 위한 훈련 혹은 자신의 건강을 위한 훈련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영적인 훈련은 "그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세속화의 가장 무서운 부분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내면과 영혼의 훈련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훈련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기본적인 분위기가 "훈련이 왜 필요한가?"라고 반문하는 문화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이 분명히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훈련에 대한 모든 의구심에 대한, "가장 확고하고도 궁극적인 답변"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욱 새로워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훈련의 프로그램들을 제시하고 참여시킴으로써, 헌신된 운동 선수처럼 계속적으로 사람을 키워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목회자의 끈기와 비전에 대한 헌신"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라는 한 목사님의 한마디 속에서, 그분이 넘어야 했던 수 많은 파도들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 성도의 궁극적인 모습은 "치열함 속에 겸손"이다.
"장기적인 훈련인 농부 훈련"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가장 깊은 겸손함"을 만들어내는 훈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한목사님의 강의가 참 좋았던 것이, "인간의 책임을 경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높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타락하고 소망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상황이 "나의 삶의 책임을 도피할 수 있는 변명"은 될 수 없습니다. 장기적인 훈련인 농부 훈련에 임하는 사람은, 삶을 대충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헛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최선을 다한 모든 열매조차도, 하나님께서 맺게 하셨음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면에서 이러한 농부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의 특징은, "탁월함과 겸손" 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총명"에 대한 이해
저는 교육학을 공부하였지만, "총명"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연구해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말씀을 들으면서 조금 더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고,
이것이야 말로 "성도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한 목사님이 제시하신, 돌파력, 이해력, 그리고 어우러짐은 모든 목회자와 성도가 꿈꾸는 너무나 큰 이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중에 한가지만이라도 충분히 이룬 사람이 과연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요? 하지만 분명한 이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탁월함을 보았습니다.
저는 먼저 디모데후서 3:7에서 “생각해 보라” 라는 것은 "명령형"이라는 것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명령"이라는 것은 매우 낯섭니다. 현대인들은 마치,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에 달린 것처럼" 착각합니다. 삶의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교만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실상, "성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자신이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해도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훈련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명령 하신 것은 분명히 그 의도가 있습니다. 먼저 사전적인 의미에서 “생각하다”라는 것을, 로우 나이다 사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30.3 νοέωb: to think over a matter with
care—‘to think about carefully, to
consider well.’ ὁ ἀναγινώσκων νοείτω ‘let the reader think carefully’ or ‘note to the reader: carefully
think about what this means’ Mk 13:14; νόει ὃ λέγω ‘think carefully about what I am
saying’ 2 Tm 2:7.
Johannes P. Louw and Eugene Albert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6), 349.
흥미로운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
단순히 스쳐 지나가듯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깊게 이것들을 살피고, 마음에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강의에 적용하자면, "훈련이 주는 의미와 그 내용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해서, 삶의 중심 축으로 삼고 그것을 확고하게 붙들라" 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훈련의 결과인 “총명” 에 대해서는 로우 나이다 사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32.26 συνίημιb or συνίω; σύνεσιςb, εως f: to be able to understand and
evaluate—‘to be able to comprehend, to
understand, to be intelligent, insight, intelligence.’
Johannes P. Louw and Eugene Albert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6), 382.
그리고 이러한 총명에 대하여서, 다양한 주석가들은 추가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QUESTION—What is meant by σύνεσις ‘understanding’? Basically the Greek word
carries the idea of bringing things together and thus understanding them [Lns].
It is to have the ability to grasp mentally and make discerning judgment [El].
It means understanding [EBC, GNC, Lns, LSA, My, TG], intelligence [MNTC],
enlightenment [HNTC, Lns], comprehension and insight [NTC], right judgment
[Brd], discerning judgment [El], discretion [NCBC], wisdom [EGT, TNTC].
Eugene Minor, An
Exegetical Summary of 2 Timothy, 2nd ed. (Dallas, TX: SIL
International, 2008), 51.
결국 총명에 대한 이해는, 단어만 놓고 보자면 "어떤 것을 이해하고 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것을 이해하고 지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통찰력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어적인 의미만 놓고 보자면, "매우 지적인 기능을 가진 단어"입니다.
* 총명은 "전인격적 훈련의 결과"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먼저 "보통의 사람들의 착각"입니다.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 모두가 삶의 통찰력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두가 그토록 소망하는 통찰력이라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훈련의 결과 혹은 단순히 단기적인 훈련의 결과가 결코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총명을 얻는 것은, “전인격적인 훈련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위기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 위하여 다양한 형태로 훈련에 임하고, 장기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그 과정을 감당하는 사람만이 얻게 되는 것"이 총명입니다. "절체 절명의 위기와 영적인 전쟁 상황을, 한 인격이 힘들게 고단하게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총명은, 지적인 열매라기 보다는, 반드시 "성경적인 전인격적 훈련의 결과"로 보아야만 합니다.
* "총명과 훈련"은 순환적이다.
“범사에” 총명을 주신다라는 말씀이 참 흥미롭습니다. 단순히 주해적인 관점으로는 이 내용을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 이상의 차원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한 목사님께서 범사라는 부분을 적용하신 결과가 바로, 돌파력, 이해력, 어우러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탁월한 성도의 특징들은, 결국에는 "범사의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목사님은, 총명이라는 것을 단순히 지적인 것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함께 나타나는 가장 실천적인 것으로 이해하시는 듯 합니다.
저는 아직 “범사”에 총명을 논할 수준은 아닌 듯 합니다. 다만 제가 이번에 주목하고 마음에 품은 것은, "영적인 훈련은 순화적"이라는 것입니다. 세가지 훈련을 통해서 더 깊어진 신앙을 가진 사람은, 더욱 큰 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총명을 얻은 사람은, 세가지 훈련의 가치를 깨닫고 더 그것에 매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를 포함해서 모든 성도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성도의 성숙의 길” 이라는 것입니다.
* "진실한 삶"에 매진하라.
결론적으로, 제가 현재 상황에서 무엇을 붙들고, 어떤 태도로 훈련에 임해야 하는 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성경적으로 확고하게 붙들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한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서 더욱 명료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의 삶의 태도를 지지해주고 그것에 대해서 성경적인 기반을 제시해준다면 그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귀한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과 끈기" 입니다.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훈련에 임하는 것만이, 열매를 맛보는 길입니다. 앞으로 바로 이 내용을 저의 목회의 비전으로 삼고, 더욱 성도의 진실한 삶에 매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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