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내용이라도 누가 그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들립니다. 많이 들어 보았던 이야기들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에 따라서 집중도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가치를 최대한 더 풍성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그 이야기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갈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는 말을 별로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때론 신나서 저의 이야기를 풀어 놓지만 그렇게 흡입력 있는 이야기들을 항상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설교 만큼은, 많이 들어본 본문이라 할 지라도 조금이라도 성도님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전체 맥락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고민한 부분이 좋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입장에 조금이라도 서 보려고 했던 시도가 좋았습니다. 다니엘의 겸손한 기도가 좋았고, 그의 감사와 찬양이 참 좋았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다니엘과 친구들의 믿음을 새롭게 하시고, 그들에게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넘치게 만드신 하나님의 역사는 이번에 저 역시 새롭게 발견한 부분입니다.
대부분의 스터디 바이블들은, 이 본문에 대해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제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루터란 스터디 바이블은 담대한 해석과 함께 감명 깊은 내용을 제시하였습니다.
In
contrast to pagan gods, the God of heaven reveals mysteries (cf v 47). This
revelation is the critical turning point in the story. vision of the night. Dream. blessed.
Daniel’s confession of praise follows in vv 20–23. See p 842.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1399.
원래 다니엘서는 자주 설교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자주 보지 않던 주석인데, Daniel for You 주석이 이번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내용이 굉장히 좋아서 놀랐습니다. 저자인 David Helm은 글을 굉장히 잘 쓰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다니엘과 친구들의 입장에서 잠시라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주었습니다.
It’s
not hard to imagine what Daniel and his friends were feeling on their long walk
to Babylon. I am reminded of the journey Vince Lombardi made with his family
upon leaving the New York Giants (an American football team) to take the
head-coaching job with the Packers. His biographer recounts the trip:
David Helm, Daniel for You, ed. Carl Laferton, God’s Word for You (The Good Book Company, 2015), 16.
특별히 느부갓네살의 기도는 저도 처음으로 접한 자료입니다. 마르둑에 대한 그의 신앙과 그의 정서를 고려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게기가 되었습니다.
The
reason lies elsewhere. Texts outside the Bible indicate that Nebuchadnezzar was
a very religious man. In fact, the British Library houses an inscription which
contains the prayer he prayed to Marduk, the main Babylonian deity, before
ascending his throne. On the day of his coronation, Nebuchadnezzar prayed:
“O,
Eternal ruler, Lord of everything that exists.
To
the king whom thou lovest, and whose name thou hast mentioned,
Grant
that his name may flourish as seems good to thee.
Guide
him on the right path.
I am thy prince, thy favorite, a creation of thy hand.
David Helm, Daniel for You, ed. Carl Laferton, God’s Word for You (The Good Book Company, 2015), 30.
결국 설교의 핵심은, 고난 그리고 그 고난을 지날 때의 하나님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어려움이 찾아와서 마음이 울적하고 힘이 없을 때에, 또 용기가 없어서 내일을 마주할 자신이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제 자신을 위한 설교이기도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이 글을 읽으시는 누군가가, 함께 고난 가운데서도 기꺼이 찬양과 감사를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 다니엘 2장 14-23절 설교
성도님들께서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경험했던 그들의 현실에 대해서, 어떤 감정과 어느 정도의 공감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남유다 왕국이 아직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에 그러나 국운이 거의 다해서 무너져 가고 있을 때에 BC 605년 바벨론의 1차 침공 때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유다 지파에 속한 왕족이었지만, 그들이 사랑하던 모든 것을 뒤로 남겨 두고 처절한 모습으로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입니다.
이들의 나이는 대략 12세에서 15세 정도로 추정할 수 있는데 비록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성인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나이이지만 여전히 청소년에 불과한 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은 심리적인 압박, 고통, 괴로움 그리고 외로움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경험한 상황은 분명히 너무나 어려운 고난이었지만, 성경은 그들이 겪은 일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1장 2절에 보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그 고난 가운데에서도 뜻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계속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이 왕의 음식을 거절할 때에도 환관장에서 그들이 은혜를 얻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가운데 채식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니엘과 친구들이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소년들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다 그리고 다니엘에게는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게 하셨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왕 앞에 섰을 때에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모든 점쟁이나 마술사보다 열배는 더 뛰어났다 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정도면 그래도 잘 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난 중에도 그래도 소망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계속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가십니다. 다니엘 2장 1절에 보니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마음이 번민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다르게, 지금 성경의 배경이 되는 바벨론 제국 당시에는 꿈을 통해서 신들이 현실에 개입을 하고 자신의 뜻을 전달한다고 믿었던 그런 문화 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느부갓네살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영국의 대영도서관에는, 느부갓네살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바벨론의 가장 중요한 신인 말르둑을 향해서 그가 기도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대략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영원한 통치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님이시여, 신이 사랑하는 왕에게 그의 이름이 번성하게 하여주소서,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주소서, 나는 당신의 왕자입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자입니다, 나는 당신의 창조물입니다, 당신은 나를 창조하셨고 모든것을 다스리도록 맡기셨습니다, 나의 마음에 당신의 신성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느부갓네살이 마르둑이라는 신에게 드린 이 기도가 얼마나 진지하고 진실한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철저하게 바벨론의 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르둑이라는 그 신이 자신의 창조주라고 확신하면서 그 신을 붙드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맥락에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해몽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사건이었고, 더 나가서 자신의 운명을 가늠할 수 없는 큰 혼란에 빠진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꿈과 해몽을 다 가져오라고 점성가들에게 말했습니다. 그의 얼토당토 않는 요구 앞에서 바벨론의 모든 점성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2장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11 왕께서 물으신 것은 어려운 일이라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마르둑 신을 믿고 그를 의지했지만, 마르둑이 준다고 믿었던 꿈 그 자체도 기억하는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신이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꿎은 점성가들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꿈과 해석을 알게 하지 않는다면 나라 안의 모든 지혜자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일이 좀 뭔가 풀려가는 것 같은데, 이제는 자신들의 입지도 좀 더 다져지고 있는데 포로로 잡혀간 나라에서 드디어 살 길을 찾았는데, 말 그대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경험했던 포로로 잡혀온 일만큼 절망적인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보다 더 급박하고 더 치명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그들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성도님들께서 이 입장이라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만약에 저라면 너무나 당황하고 충격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 충격으로 인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좀 차리고 나서는 어떻게든 이 위기를 도피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책을 세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굉장히 담대한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알려드리겠다 그렇게 제안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너무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은, 다니엘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고 너무 급박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이렇게 말했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그 이유는 말하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다니엘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미 꿈을 해석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 꿈조차 어디에서 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꿈을 다니엘에게 보여 주실 것인 아닌가 거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큰 위기 속에서 다니엘이 무엇을 했는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믿음의 친구들에게 상황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추상적인 부탁이 아니었습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은밀한 일에 대해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하고 그래서 자신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니엘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하나님의 긍휼 그분의 자비하심에 호소한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위대하시며 그분의 뜻대로 역사를 움직이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거기에 걸맞는 겸손한 모습과 태도와 기도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겸손한 기도가 마음에 정말 와 닿았다면, 또 하나 오늘 말씀을 보면서 참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꿈을 받는 과정 자체가 아니라 꿈을 받은 다니엘의 반응에 대해서 성경이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꿈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매우 신비롭고 환상적이고 어떤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신비로운 과정으로 꿈을 받았는가? 거기에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꿈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마르둑을 의지하고 마루둑을 찾고 마루둑에게 호소했지만, 성경은 그의 기대가 완전히 헛된 것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다니엘의 믿음을 반대로 부각키시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꿈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고 그분은 당연히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 그분이 주실 마음이 있으셔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기도는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응답이 너무나 소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19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환상을 본 이후에 다니엘은 바로 찬송했습니다. 환상을 보는 것과 그의 찬송 사이에는 그 어떤 것도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반응이 얼마나 즉각적이고 분명했는가를 성경이 확실히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찬송의 내용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 찬송의 내용을 보면서 그의 엄청난 영적인 확신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르둑이 다스린다는 그 이방의 땅에서 거대한 제국의 왕의 명령 앞에서 그는 무엇을 고백하는가? 그는 18절에 처음부터 기도할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간구했었습니다. 그리고 19절에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높으신 여호와에 대한 다니엘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맥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0절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께 지혜와 능력이 있다” 21절에서는 “느부갓네살을 포함해서 왕들조차 폐하고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이 참으로 감격적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와 찬양을 넘치도록 그분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다니엘서를 통틀어서 감사와 찬양이라는 이 단어들이 오늘 본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너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포로 생활 속에서 드디어 삶이 잘 풀려 나갈 때에, 그들에게 특별히 감사나 찬양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절박한 상황으로 몰려가고 결정적인 생명의 위기가 닥쳐 왔습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 기도의 응답을 받고 드디어 그들에게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사건이라는 것은 단순한 위기나 고난이 아니라,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있어서 완전한 삶의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동행하셨고 그들의 삶에 개입하시고 이끌어가셨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명의 위협과 그 고난을 기꺼이 사용하시고, 결과적으로 그분의 주권 안에서 그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더욱 풍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메시지를 듣게 되는가? 오직 여호와만이 전능하시며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이방의 땅에서 기꺼이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는 인간이 만든 우상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는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바로 이것이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 처럼, 마치 세상이 저절로 돌아가는 것 처럼, 마치 삶이 우연히 돌아가는 것 처럼 말하지만 성경은 무엇이라 선포하시는가? 창세기 1장 1절에 말하시는 것입니다.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하여 그분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기꺼이 담대하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께서 우리의 삶을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돌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우리가 붙들려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그러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때론 우리에게 고난과 어려움을 주실 때에는, 반드시 그분이 목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마치 다니엘과 친구들이 고난 속에서 자신들의 믿음과 태도가 새로워진 것 처럼, 고난 속에서 기도할 때에 우리의 믿음 역시 그리고 감사와 찬양도 동일하게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오늘 말씀의 다니엘 뿐만 아니라, 믿음의 모든 선진들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당하는 어려움을 겪었고 심지어 살 수 있다는 소망이 아예 사라져 버리는 순간까지 내몰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과연 하나님의 그 신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약속하시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무한히 부어지는 성부 하나님 자신의 그 자녀에 대한 사랑을 기억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만 의지하게 만드심으로, 오히려 우리의 신앙과 삶을 완전히 새롭게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끊임없이 찾아오는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심지어 살 소망이 끊어진 그 상황에서조차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의 찬양과 감사를 새롭게 하실 것을 믿고 오늘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자녀의 길을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난 가운데에서도 은혜를 주시며 아버지께서 여전히 저를 인도하고 계심을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상황을 해결하실 수 있는 여호와께 겸손한 기도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기억하게 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가 아버지의 뜻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알고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붙들며 저의 삶과 태도를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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