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3일 수요일

A Dying Man's Consolation


요즘에 관심을 가지는 주제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 입니다. 

범주적으로는 조직신학 안에서 기독론에 속하는 내용이며,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이루시기 위해서 행하신 두가지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신 두가지 일은,
첫째는 수동적 순종으로, 십자가 상에서 인간이 마땅히 져야 할 죄의 값을 치르신 것이고
둘째가 능동적 순종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마땅히 요구하시는,
그러므로 인간이 마땅히 성취해야했던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모든 의로움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루셨다는 내용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저 처럼 모태신앙으로 보수적 교회에서 자란 사람도,
이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수동적 순종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위해 돌아가셨다)라는 부분을
십자가 설교에서 강조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수동적 순종만 있었다면 우리는 아주 비참한 상황에 처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타락 이전의 아담의 처지에 위치한다는 것입니다.
(조직신학 송인규 교수님의 비유) 즉 여전히 의를 이루라고 하시는
(아담에게 주어진 것은 선악과를 따 먹지 마라 라는 명령)
하나님의 요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조차 이루지 못했던 하나님의 완전한 의에 대한 요구, 완벽한 순종을
과연 의지가 죄로 향해 기울어버린, 우리가 이룰 수 있을까요?


바로 이 부분에서
모든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극심한 좌절을 경험하는데,
마음에 분명한 율법의 요구를 느끼지만,
자신은 절대로 완전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고,
양심이 예민하면 예민할 수록, 그 간극이 더욱 커짐으로
심리적인 고통과 괴로움은 더욱 커져 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인들이 느끼는 자존감에 나타나는 심리적인 고통과 좌절이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우리의 의는 누더기와 같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들을 친히 이루시고(확실한 전제)
그리고 이것을 우리에게 전가(그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시고 여기시는 것)
하심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은 사실상 반쪽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본 결과,
그렇게 일반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보수적인 신실한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이 부분에서 굉장한 관심을 가진다는 점,
그리고 이것을 묵상함으로 결국 복음 안에서의 평안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제가 생각할 때에는, 능동적 순종이야 말로,
이신칭의를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근본에 있는 핵심적인 교리이자 성경이 주장하는 바로 보이는데,
이 능동적 순종이 왜 그렇게 잘 이야기되지 않을까요?

재미있는 것은, 벌코프의 조직신학에는 능동적 순종 부분에서
알미니안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인한다고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대속한다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안에서, 
나의 죄 값을 대신 지신다라는 부분(수동적)은 오히려 받아들이기 쉽지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능동적)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구원에 대하여 행위 중심적으로, 공로 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이해하는
인간의 본성에 가장 반대되는 내용이 아닐까요?

혹은, 
능동적 순종을 성경적으로 액면 그대로 이야기했을 때에,
성도들이 이제는 구원이 다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받아들이고,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전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저의 짧은 소견과 인생으로는 다 알수 없으니
앞으로 더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그저께 우연히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검색하는 사이트를 찾아서 검색했는데,
그레샴 메이첸(신학자, 웨스트민스터 필라델피아 신학교 설립자)이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I'm so thankful for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No hope without it."

이 말의 배경도 전혀 모른채 그저 읽어만 봐도,
메이첸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안에서 평안을 느꼈는지 알겠더군요. 

그런데 우연히 또 검색하다가,
호튼의 글을 통해 그 배경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소천하기 전 그의 친구이자 신학자인 존머레이에게 마지막 보낸 말이더군요. 
전율이 왔습니다. 

호튼의 글을 인용합니다. 
물론 영어로 되어 있어서 죄송하네요. 
저도 제 한몸 겨우 영어를 읽는 수준이라 해석은 못 붙이고,
또 호튼 글이 쉽지가 않아서 어려움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두시고 천천히 해석하시고 읽어보신다면,
메이첸이 누렸던 그 복음 안에서의 평안을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저작권상 글의 일부분을 옮깁니다.
나머지는 링크를 타고 따라가 읽어보세요. 

평안한 하루 되세요 ^-^



A Dying Man's Consolation
The Active & Passive Obedience of Christ
Michael S. Horton

Dismissing his doctor's orders, J. Gresham Machen, beaten down by a career of struggling for the Faith even within his own communion, kept his commitments to a small circle of Orthodox Presbyterian parishes in South Dakota. "I have too much to do," he insisted, as his chest was even then tight from pneumonia. The next day, however, Machen was hospitalized. On New Year's Eve, the host pastor visited this infamous opponent of Liberalism on his deathbed and the elder statesman related a dream he had enjoyed that made him long for Heaven. "Sam, it was glorious, it was glorious," he said. "Sam, isn't the Reformed Faith grand?" Just before he passed into the next world, Machen dictated a telegram to John Murray, professor of systematic theology at Westminster Seminary. These last words read, "I'm so thankful for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No hope without it." (1)
Once more we are reminded of just how practical and relevant doctrine can be in our deepest crises. When all is well, we can dispense with such questions, but not when the truly great issues of life are staring us in the face. But what is this "active obedience of Christ" to which Machen referred and why was it such a remarkable comfort in his dying hour?
John Murray, the recipient of that famous telegram, wrote eloquently of this great biblical doctrine. "Early in our Lord's ministry we have his own witness" to being the promised "Servant of the Lord" in Isaiah, says Murray. When John the Baptist questioned the propriety of him baptizing the Messiah, Jesus answered, "Let it be so now; it is proper for us to do thi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Mt 3:15). (2) It was our Lord's great pleasure and duty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down to the least stroke of the Law: "I came down from heaven, not to do my own will, but the will of him who sent me" (Jn 6:38). Calvin observes, "Now someone asks, how has Christ abolished sin, banished the separation between us and God, and acquired righteousness to render God favorable and kindly toward us? To this we can in general reply that he has achieved this for us by the whole course of his obedience." (3)
We are told in Scripture that Jesus Christ was both human and divine. Because of this union of the divine with the human nature, "he grew in wisdom and stature and in favor with God and man" (Lk 2:52). In fact, he "learned obedience from the things he suffered" (Heb 5:8). This is not at all to suggest that our Lord was sinful, but in his humiliation he was truly and fully human. That is, just as he grew up physically, so too he progressively obeyed God throughout his life. At no point did he fail to respond positively to his Father's will, so his growth was perfect and complete.
It is impossible for us to imagine what it would have been like for this Son of Man to experience genuine temptation in precisely the same way as it comes to us and still to have turned his will from every form of hatred, lust, selfishness, greed, pride, laziness, and every other form of disobedience, whether in thought, word, or deed. He sinned neither by omission nor commission, neither by ignorance nor malice. Even when faced with the temptation in the wilderness, where Lucifer offered him the kingdoms of the world (as if he owned them), in addition to food to satiate his fast-weary body, Jesus, unlike the first Adam, answered with the Word of God.
But more than all of these countless acts of obedience and perfect conformity to his Father's will in mind, body, soul, and heart, there was one act of obedience that crowned our Savior's righteousness: "Who, being in very nature God,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grasped, but made himself nothing,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 being made in human likeness. And being found in appearance as a man,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to death-even death on a cross!" (Phil 2:6-8). This death is our Lord's passive obedience, just as his active obedience is his thirty-three years of perfect conformity to God's will. Although some other word might be preferred, the "passive" nature of Christ's obedience to death took the form of suffering, while his "active" obedience took the form of doing. It was not merely the agony of the cross as a form of human punishment, nor indeed even the unjust accusations of his tormentors, but the divine curse that was attached to this death that made this step of obedience so daunting. For this reason, our Lord prayed in Gethsemane, "Lord, if it is possible, take this cup from me." And yet, even in the face of divine judgment, when he would bear the sins of his people, he still prayed,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Mt 26:41-43).
This obedience was voluntary. "I am the good shepherd; I know my sheep and my sheep know me--just as the Father knows me and I know the Father--and 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No one takes it from me, but I lay it down of my own accord. I have authority to lay it down and authority to take it up again. This command I received from my Father" (Jn 10:14-18). Because it was a voluntary obedience, it is offered to the Father as the eternally meritorious sacrifice of the God-Man. "By the obedience of the one man many shall be declared righteous," Paul declared (Rom 5:19), contrasting the imputation of the first Adam's guilt and the imputation of the last Adam's righteousness. Thus, in his high priestly prayer, our Lord prays, "For them I sanctify myself, that they too may be truly sanctified" (Jn 17:19). Throughout the Old Testament, one of God's names had been Yireh-Tsadikenu, "The Lord Our Righteousness," and in First Corinthians this is applied to Christ, "who has become for us our righteousness, holiness and redemption" (1:30).
So what does all of this mean for us in our troubles? Why did Machen find so much satisfaction in clinging to this promise on his deathbed?
First, it is quite easy for us to believe that God is lenient. We conceive of him as Santa Claus: "He knows when you are sleeping, he knows when you're awake. He knows if you've been bad or good, so be good for goodness sake." But who would think of jolly 'ol St. Nick punishing people for their sins? And yet, that is what the Bible insists God will do at the end of history. The same Jesus who empti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unto death, even death on a cross, will return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t will be a trial of strict justice and nothing short of perfect righteousness will be required of each of us. Either it will be our own, or borrowed from the host, but God will not be lenient on that dreadful day.
...
나머지 내용은 링크를 복사해서 따라가세요 ^0^
http://www.modernreformation.org/default.php?page=articledisplay&var1=ArtRead&var2=728&var3=main

2011년 7월 11일 월요일

이야기의 힘


신학교 시절부터 늘 고민했던 주제 중 하나는 '통찰력' 이었습니다.
사실과 사실의 인과 관계를, 인생과 사람과 미래에 대한 것을 꽤뚫어보는 통찰력,
과연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고민하여 얻은 결과의 핵심은
인류 지성의 역사에 기억될만한 탁월한 사람들의 책을 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관련서적 : 리딩으로 리드하라-이지성)

저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좀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그 안에서 핵심 중 한가지는  '항구성' 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가치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지요.

인류가 끊임 없이 추구해왔던 그 길들,
그리고 그 안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검증된 그 어떤 것을 찾아낸다면,
그것이 저 역시 혹은 우리 역시 마땅히 추구해야 할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험주의는 반대하며, 일반은총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역사를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항구성'을 가진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를 발견했으니
바로 '이야기' 입니다.

어렴풋이 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감을 잡고
관련된 책도 몇권 읽어 보았지만
(관련서적 :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20가지 플롯-로널드 B. 토비아스 지음)
다시 한번 그 이야기의 힘과 중요성에 대해서 깨닫는 좋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EBS다큐 프라임 - 이야기의 힘(총3부)'

존경하는 한성진 교수님과 주재형 목사님에게 배운 귀한 것은,
탁월한 분들은 다큐를 좋아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도 다큐를 보게 되었네요.

우연히 검색하다가 단 한편을 보았을 뿐인데,
마음과 심장이 떨립니다.

속 마음은,
누구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나만 혼자서 알고 싶은 그런 마음이네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성도로서 목회자로서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다큐인 듯 합니다.

네이버에서 검색하니
무료로 볼 수 있는 블로그가 뜨는군요.

꼭 한번 보시고,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평안한 하루 되세요. ^-^

2011년 7월 9일 토요일

무한도전 - 대중의 기호를 넘어선 각성


불신자와 대화할 때 우리의 목표는, 기독교야말로 우리가 선이론적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진리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론적 체계임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불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념과 실제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비일관성을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돕는데서 시작한다. 철학자 로이 클라우저가 설명하듯이, 세계관을 시험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세계관의 입장에서 특정한 자료에 대한 타당성이 있는 설명을 줄 수 있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 이다. 우선 불신자의 세계관이 경험 자료에 대해 "타당성 있는 설명"을 제공할 수 없음을 보인 연후에야, 기독교가 일관되고 논리적인 답을 주는 유일한 세계관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 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577-578p)


평소에 즐겨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무한도전' 입니다.

개성이 넘치는 맴버들이 탁월한 구성 안에서 하모니를 이룹니다. 그들은 항상 불가능 할 것 같은 목표를 정해서 그것을 이루고야마는 열심과 열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프로를 보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인간의 도전과 성취의 가치에 대해서 감동을 받습니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어두운 부분까지꼬집고 넘어가는 시사성까지 가지고 있지요.
그러므로 누가 뭐래도, 무한도전이야 말로, 이 시대에 몇 안되는 가장 탁월한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고속도로 가요제는, 음악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멤버들과 뮤지션들의 감성적 공유와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볼 수 있기에 빠뜨리지 않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무한도전이,
모든 부분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유익을 끼치는 프로그램일까요?

이번 고속도로 가요제 방송 마지막에,
이적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유재석이 노래를 하더군요.

'말하는 대로'

마음을 사로잡는 이적 특유의 멜로디에,
진솔하고 담담하게 유재석의 목소리를 통해
가사가 흘러나왔습니다.


'나 스무살 적에 하루를 견디고
불안한 잠자리에 누울 때면
내일 뭐하지 내일 뭐하지 걱정을 했지

두 눈을 감아도 통 잠은 안오고
가슴은 아프도록 답답할 때
난 왜 안되지 왜 난 안되지 되뇌었지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곤 믿지 않았지 믿을 수 없었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단 건 거짓말 같았지 고개를 저었지

그러던 어느날 내 맘에 찾아온
작지만 놀라운 깨달음
내일 뭘 할지 내일 뭘 할지 꿈꾸게 했지

사실은 한번도 미친 듯
그렇게 달려본 적이 없었던 것을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단 걸 눈으로 본 순간 믿어보기로 했지

마음먹은대로 생각한대로
할 수 있단 걸 알게 된 순간 고갤 끄덕였지...


데뷔 초부터 무대 울렁증으로 늘 고생하고 힘들었던,
그러나 이 시대의 탑 스타로 성공한 한 연예인의 입을 통해서,
당신이 말한다면, 그 말하는대로 인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용기를 주는 노래말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핵심은 간단했습니다.
지금부터 소망을 가지고 기대하고 말한다면,
혹은 다른 말로, 성공을 되뇌이며 꿈꾸며 노래한다면,
당신은 얼마든지 나와 같은 자리에 올라올 수 있고
소위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듣는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과연 저것은 무슨 해괴한 이야기인가?...

굳이 어려운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마이클 호튼의 주옥같은 책들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굳이 이 허접한 글에서,
중세를 지나 계몽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인간이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면(마치 무한도전의 멤버들 처럼)
반드시 이 땅에 평화와 성공과 참 행복이 찾아오고야 말 것이라 믿었던
수 많은 사람들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유재석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지금 이 시대를 휩쓸고 있는 성공주의, 낙관주의, 혹은 부흥 신학을
되풀이하는 또 다른 메아리로 들렸던 것은, 비단 저 뿐이었을까요?

분명히 확실히 말하건데,
인생은 말하는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함으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열심으로 사는 것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노력하는 자가 노력한 그 이상의 보상을 받음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이 아니라,
이미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이고, 사람들의 탐욕과 욕심으로 망가져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오직 깨어있는 사람들만이, 세상의 부조리와 죄악을 직시하고 있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그 세상 안에서 믿음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의 노력과 도전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력과 도전을 통해 영광받으시고(그들의 창조주이시기에 받으시기 합당한) 그것을 사용하시는,
오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일반은총 관점에서 작용함으로
어느 정도의 정의와 보상이 존재하고, 세상이 그나마 운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말하는대로 세상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무한도전 처럼 도전하지만, 그 도전이 실패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실패조차도, 하나님께서 선으로 만들고 마실거라는 믿음을 가지며,
좌절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실패조차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 믿는 사람들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오직 하나님만이,
죄악된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진정한 무한 도전의 멤버이십니다.
가장 아름답게 창조된 아담과 하와조차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났지만,
단 한번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도전으로, 구원을 약속하시고,
온갖 사단의 방해와 인간의 실패와 반항에도 불구하고,
변치않는 하나님 그분의 열심으로, 택자를 구원하시고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단연코, 이 땅에서 무한도전의 유일한 출연자와 성공자는 삼위일체 하나님 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말하는대로' 된다는 노래를 되뇌이고 있다가,
내가 한번도 내 입으로 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고난과 실패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과연 무슨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그때서야 내가 그토록 불렀던 그 노래가,
사실상 헛된 바램과 거짓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할 것이며,
그렇게 환상에 빠져 오랜 시간을 허송세월 했다는 뼈아픈 고통을 경험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담담하게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셨을 때에는 참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우리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을 때에는 인내 가운데 기다리며,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참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설령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부어진 사랑 안에서 기뻐하며,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를 위해서 이미 예비된 영원한 천국을 사모함으로 기뻐하는,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자녀, 상속자,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입니다.

'무한도전' 좋습니다.
얼마든지 보십시오.
저도 앞으로도 볼 것입니다.
좋은 것을 배울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깨어있기를 원합니다.

대중의 기호를 넘어선 각성이,
저와 여러분에게 언제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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