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5일 일요일

지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당신에게 / Think : The Life of the Mind and the Love of God - John Piper


First, against anti-intellectual tendencies, he argues that careful thinking is integral to a full apprehension of the gospel. Second, against the prideful use of the intellect, he argues that clear thinking following biblical patterns will lead away from self to a full delight in God’s grace as the key to every aspect of existence.

첫째로, 반 지성주의적인 경향들에 대해서, 복음의 충만한 수준에서의 이해를 위해서는 깊은 사고가 필수적이라고 파이퍼는 주장합니다. 둘재로, 지성을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 교만한 자들을 향해서는, 성경적인 패턴을 따르는 분명한 사고는, 자기 자신으로 부터 멀어지게 하며 동시에 존재의 모든 국면에 대한 키로서, 하나님의 은헤의 충만한 기쁨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합니다.

Piper, John (2011-03-31). Think (Foreword by Mark Noll): The Life of the Mind and the Love of God (Kindle Location 119). Crossway. Kindle Edition


저는 역사를 잘 못합니다. 약한 기억력과 떨어지는 감각이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로서 한가지 붙잡고 있는 것은, 전체의 그림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건 하나하나가 몇년도에 일어났는가 등의 사실도 중요하겠지만,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과 맥락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면, 현재의 우리를 점검하고 미래를 대비하는데 아주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는 크게 두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지성주의와 반 지성주의입니다. 지성주의는 하나님의 은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성이 필수적이라 주장하는 입장이고, 반 지성주의는 지성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제가 이해할 때에는, 토마스 아 캠피스 같은 분이 반 지성주의 쪽에, 그리고 지성주의 쪽에서는 프란시스 쉐퍼 등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쉐퍼를 읽고 좋아 합니다. 그는 서양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모든 우리의 깊은 사고의 근본에서 부터 문제를 찾아내고, 그것을 수정함으로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키고자 합니다. 중요한 점은, 왜 지성이 중요한 것인지, 기독교 인에게 생각이라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쉽게 풀어져 있는 책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쉐퍼는 이미 사고의 중요성을 전재하고 있기 때문에, 생각(thinking)의 중요성 그 자체를 깊이 다루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이 다시 한번 기독교 인에게 생각(thinking)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목회학 박사 과정 논문을 준비하면서 킨들 북으로 단지 $0.99에 구입했는데, 첫 페이지를 열자 마자, 이것이 보석임을 알았습니다.

급격하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신의 삶 가운데 빛과 소금이라는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깊은 사고가 필요합니다. 도대체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하나님께서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알려 주실 것 같습니다.
소리 내서 읽고, 줄을 치고, 메모를 하고, 함께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보석같은 책의 여정 안으로,
당신 역시 초대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Church of the Servant 성찬에 대한 소고 / It's O.K. - BeBe & CeCe Winans


Church of the Servant 교회(www.churchoftheservantcrc.org, 이하 COS)는,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가 속한 CRC(Christian Reformed Church) 교단 소속의 교회입니다. 장로 교단과 동일하게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교회로써, CRC 교단 안에서도 예전으로 특화된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 저는 칼빈 신학교 재학 시에, 개혁주의 신학이 어떻게 예배 예전 가운데 표현되는가를 배우고자 하는 목적으로, 정식 교인으로 등록하여서 1년 정도 출석하였습니다. 

성찬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COS의 전체적인 예배의 느낌은 현대적인 열린 예배와 반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COS의 주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예배 순서는 신학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리더의 멘트에 따라서 그 순서의 의미가 설명되고 규정 됩니다. 그러므로 즉흥적인 부분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일정한 형식에 따라서 차분하게 진행 됩니다. 

현대적인 악기들로 반주되는 감성을 충분히 고양시키는 찬양이, 예배 초반에 집중적으로 배치되는 현대적 예배와 다르게, 거의 클래식한 악기들로만 구성되는 찬양이, 예배 구성에 따라서 그 신학적 맥락에 따라 적절히 배치 됩니다. 

그래서 COS에서 예배를 드리면, 찬양이 예배 전체적으로 흩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일반적인 현대적 예배 가운데 찬양이 압도적인 비중을 가지는 것에 비해, COS의 예배는, 예배의 순서 가운데 찬양이 예배를 섬기는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끔은 현대적인 곡들도 부르지만, 주로 CRC 교단에서 만들어진 찬송가집 속에서 곡을 찾습니다. 또한 다국적 사람들을 섬기는 COS의 정책에 따라서 다양한 나라의 찬양을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예배 분위기 가운데 성찬이 진행 됩니다. COS의 특징은 매주 성찬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매주 성찬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가장 큰 강점이자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 때에 설교와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배우지만, 실제로 거의 행해지지 않는 성찬은 그저 이론 속에만 존재하는 은혜의 방편일 뿐입니다. 실제로 정성스럽게 준비된 성찬을 매주 경험한다는 것은, 결코 다른 어떤 예배나 집회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하고 뜨거운 은혜의 체험이었습니다. 

매주 진행되는 성찬은 결코 형식적인 순서가 아니라, 매주 예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체 예배 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이며, 그 중에 설교는 25분 정도입니다. 그리고 성찬 전체를 진행하는데 역시 25분 정도가 소요 됩니다. 즉 설교는 일반적인 소위 대 예배 설교보다 훨씬 짧고, 그 대신에 성찬에 충분한 시간이 할애 됩니다. 

즉 COS의 실제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 COS의 전체적인 예배 구성이, 지나치게 설교 중심적인 한국의 일반적인 예배와 분명히 다르며, 예배 전체를 하나의 통일적인 완성체로 인식하고 진행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또한 그 예배 가운데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설교와 성찬이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일반적인 한국 교회에서의 성찬은 아주 특별한 행사 라는 개념이 강한 듯 합니다. 즉 성찬 때에는 집례하시는 목사님(담임 목사님)이, 성찬에 대한 모든 설명과 그 의미를 장황하게 일일이 다 설명한다는 의미입니다. 매 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하는 특별한 행사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강한 인상을 주고 은혜를 주어야 한다는 압박이 그런 결과를 만든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COS의 성찬은 아주 간단하며 핵심적인 설명만이 성찬 때에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한 신학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멘트가 이미 주보 안에 있고, 성도들은 매주 그것을 반복하여서 듣고, 역시 주어진 멘트에 따라서 화답합니다. 특별한 행사 때 주어지는 화려한 혹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설명들이 아니라, 정교하게 만들어진 단어들과 문장들로 만들어지는 의미를 매주 반복하여 인식함으로써, 성찬의 의미와 그것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무의식 중에 교육 받게 됩니다. 

성찬을 위한 빵과 포도주를 준비할 때에(Preparation of the Elements), 집례자는 어른의 허벅지만한 빵을 높이 들고 반으로 나누며 The bread which we break is our sharing in the body of Christ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We who are many are one body, for we all share the same loaf. 라고 화답합니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선포와 화답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성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도들은 화답 가운데, 자신이 교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성찬이, 지나치게 개인적인 죄 사함 혹은 은혜 주심에 초점을 맞추는 일반적인 한국의 성찬과 대조되는 점이라 생각됩니다. 

COS의 성찬이 독특한 점은, 약 300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두 일어나 순서대로 앞으로 나아가 성찬을 한다는 점입니다. 성찬이 시작되면 모두 일어나 찬양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맨 앞줄부터 순서대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강대상이 있는 본당 앞 작은 무대는, 특별하게 강대상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 둥근 원형 무대를 중심으로 성도들이 순서대로 나와 둥글게 섭니다. 

그리고 집례자로부터 빵을 받은 장로 혹은 집사들은, 그 빵을 둥글게 선 사람들 중 한쪽 끝 사람에게 줍니다. 또한 바로 이어서 집례자로부터 포도주(혹은 포도 주스)를 받은 장로 혹은 집사들은, 포도주가 담긴 커다랗고 아름다운 도자기 잔을 동일한 사람에게 줍니다. 그러면 이제 그 빵과 포도주는, 둥글게 선 사람들을 통해서 옆으로 전달되게 됩니다. 

먼저 빵을 받고 그리고 포도주를 받으면, 스스로 빵을 자신이 뜯어서 포도주 잔에 담근 후에 먹습니다. 그리고 옆 사람에게 빵과 포도주 잔을 넘겨줍니다. 빵을 옆 사람에게 넘겨 주면서 This is the body of the Christ for you 라고 말하고, 또한 포도주 잔을 옆 사람에게 넘겨 주면서 This is the blood of the Christ for you 라고 말합니다. 

성별과 나이와 경제력이 다른 성도들이 함께 둥글게 모여서, 동일한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옆 사람에게 당신을 위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들을 때에,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 먹으며 또한 동시에 옆 사람에게 그 내용을 전달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한 믿음의 가족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아주 강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즉 개인적인 죄 사함과 또한 공동체 성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집례자가 장로님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고, 그것을 장로님들이 성도들에게 일대일로 나누어주는 한국적인 맥락과 크게 다른 부분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곰곰히 생각해 보면, 한국의 일반적인 성찬은, 공동체성을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배가 11시에 시작하고 성찬이 시작되는 12시쯤에는 한참 허기진 때라는 것입니다.(특히 제가 늘 그렇습니다) COS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빵은, 배고픈 이들은 얼마든지 크게 떼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크기입니다. 그리고 커다란 잔에 담긴 포도주 또한, 얼마든지 넉넉하게 찍어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작은 밀가루 혹은 전병 조각과, 엄지 손가락 보다 작은 잔에 담긴 포도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함입니다. 편의성에서는 그것이 좋을 지 모르겠으나, 성찬의 의미를 살리는 데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손톱만한 전병 조각과 아주 작은 잔에 담긴 포도주를 먹을 때에 슬픔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해서 부어주신 사랑, 그분의 찢으신 그 몸과 부으신 그 피는,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성찬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시키고 있다는 염려를 가지게 됩니다. COS에서는 적당히 그러나 마음껏 뜯어서 먹고 마시는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풍성한 사랑을 매주 경험했습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성찬 가운데 모든 어린이들이 부모와 함께 동참할 수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주보에 (Children may join their parents in the communion circle for a spoken blessing)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CRC 교단 가운데 최근까지 중요한 이슈는, 성찬에 믿음의 자녀들이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한국의 경우는, 세례 혹은 입교를 받은 성도들만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고, 유아 세례를 받은 자녀 혹은 믿음이 있지만 세례를 못 받은 청소년들은 성찬에서 배제됩니다. 

어떻게 CRC교단 안에서 결론이 났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COS에서는 부모가 믿음을 가진 경우, 아주 어린 아기부터 어린이들까지 부모 손을 잡고 성찬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떡과 잔을 먹지는 않지만, 그 성찬의 자리에서 장로들 혹은 집사들의 축복 기도를 받습니다. 아기들과 어린이들이 그리고 축복 기도를 받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부모들이, 그 자리 속에서 얼마나 큰 뿌듯함과 기쁨을 누리는지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COS 성찬의 또 하나의 독특한 점은, 성찬이 진행되는 모든 시간 동안 찬양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성찬을 위해서 순서대로 성도들이 앞으로 나가며 찬양을 부르고, 또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성찬을 기다리는 성도들 역시 함께 찬양을 부릅니다. 

성도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성찬에 성도들이 다 참여하기 위해서는 거의 여섯 곡 정도의 찬양을 부르게 됩니다. COS의 찬양에 대한 모든 구성은 Greg Scheer(www.gregscheer.com) 가 담당하고 있는데, 한국에도 번역된 The Art of Worship이라는 책을 쓴 탁월한 뮤지션입니다. 다양한 악기에 능하고 특별히 예배를 위한 곡 선곡에 탁월합니다. 

한국의 성찬이 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것에 따른 슬픔과 애통의 감정에 초점이 많이 맞춰져 있다면, COS의 성찬 때 부르는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승리를 누리는 좀더 밝고 동시에 진실하며 웅장한 느낌의 곡들을 많이 부릅니다. 

COS의 음향 시스템은 매우 부족하지만, 공간 자체가 아주 훌륭한 공명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온 회중이 함께 찬양을 부르는 그 사이를, 줄을 서서 통과하며 성찬을 받기 위해 앞으로 나갈 때면, 마치 천국 문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들어가는 듯한 마음의 감격을 여러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예배에서, 앉은 자리에서 예배 초반에 여러 곡을 부르는 찬양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감정적인 경험입니다. 

결론적으로, COS의 성찬은 매우 특별합니다. 그것은 일년에 몇 번 어쩔 수 없이 하는 성찬이 아닙니다. 예배 가운데 확실한 은혜의 방편으로 준비된, 매주 경험하는 실제적인 은혜의 체험입니다. 

신학적으로 잘 짜여진 구성과 멘트 안에서, 성도들은 그 성찬의 의미를 매주 반복해서 배웁니다. 집례자의 멘트를 통해서 그리고 성찬을 나누는 그 배치를 통해서, 성도들은 개인적인 은혜의 체험뿐 아니라 교회의 공동체성을 함께 경험합니다. 믿음의 자녀들은 함께 성찬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성찬 가운데 감사함으로 내 몸 속으로 들어가는 풍성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성찬 동안에 울려 퍼지는 모든 성도의 힘찬 찬양은,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그 자리에 넘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응이고, 그분이야 말로 높임 받으실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감격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COS에서 누리는 성찬의 자리는, 그것이 과연 천국의 자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좀 더 자세한 Church of the Servant 의 성찬에 관한 신학과 설명은
이하 링크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 COMMON QUESTIONS ABOUT OUR WORSHIP
http://www.churchoftheservantcrc.org/worship/worship-at-cos-frequently-asked-ques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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