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9일 금요일

죽음의 때를 바라보며, 여호와를 위하여 오늘을 살라 / 전도서 7장 1-14절 설교

 



내가 어떤 성경 구절을 들어본 적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분들이, 자신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만 합니다. 내가 어떤 성경 구절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설교의 맥락 안에서 풀어내고 상대방을 설득하며 논증해 나가는 것도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설교를 쉽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절 어떤 단어를 발판 삼아서 풀어나가면 됩니다. 상대적으로 쉽지만 성경적인 설교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국 단어와 문장, 그리고 문단의 연결들을 통하여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전도서와 같은 본문의 설교를 준비하다보면, 이렇게 문단 전체를 구성하는 흐름을 이해하고 안에서 설교를 풀어낸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절 한절을 설명하고 이어가는 것도 버거울 정도입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본문 전체의 흐름을 조망하면서 안에서 핵심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스터디 바이블 두권은, NIV Bible Speaks Today 스터디 바이블, 그리고 NIV Grace and Truth 스터디 바이블입니다 (이하 GT). 이번 설교의 구조적인 부분에서는 GT 스터디 바이블이 가장 도움이 되었습니다.

7:1–14 Rather than coast along up at the shallow surface, the wise go deeper. Life does not always present us with only one obviously right path to take. Instead, we must deeply discern which path is “better” than the others. It takes wisdom to see, for example, that hardship can be better than fun (vv. 1–6). We might grow more from the hardships and pain of a funeral than from the ease and fun of a party. But we are certainly not helped along our way by yielding to this world’s corruption (v. 7), impatience (v. 8), touchiness (v. 9), or nostalgia (v. 10). Wisdom helps the way an insurance policy helps; but wisdom is better than money (vv. 11–12). Above all, let’s remember that, in good times and bad, it is the sovereign God we are always dealing with. Enduring the pain we cannot remedy and facing the outcomes we cannot predict, we are wise to stay humble before him (vv. 13–14).

David Gundersen, “Psalms,” in The NIV Grace and Truth Study Bible, ed. R. Albert Mohler Jr. (Grand Rapids, MI: Zondervan, 2021), 889–890.

내용이 너무 깔끔하고 탁월해서 처음으로 저자를 찾아봤습니다. 로고스 각주가 자동으로 처리되는데 오류가 있는 같네요. 위에는 시편에 David Gundersen라고 나왔지만 실제로 스터디 바이블을 찾아보면 Raymond C. Ortlund, Jr. 전도서 부분의 저자입니다.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10 도안 구약 교수를 하셨군요. 그리고 보수적인 PCA 교단에 속한 경험도 있습니다. 다른 스터디 바이블을 모두 살펴 보았지만 위에 내용을 보자 마자 저의 설교의 틀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듣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토니 에반스 목사님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학위가 있어서 지혜를 얻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은 설교에 거의 직접 인용하였습니다. 토니 에반스 목사님은 완벽한 분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탁월함을 보여주십니다.

7:5–6 Being wise isn’t tied to academic accomplishment: a fool can have a PhD. Wisdom is the ability to make spiritually informed decisions. It’s applying the divine truth of God’s kingdom rule to every area of life. If someone with a divine perspective rebukes you, let him speak into your life so you can become wise. A wise rebuke is far more valuable than a fool singing your praises.

Tony Evans, The Tony Eva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 2019), 752.

이번 설교에서의 백미는, 14절에 대한 이해입니다. 단순히, "인생은 힘든 것이라고 미래를 예측할 없는 것"이라고 사실 자체를 말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는 그것이 가진 의미”, 다시 말해서 말씀이 가지고 있는 나의 삶에 대한 의미 말해 있어야 합니다. 동안 정말 많이 고민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쉽지 않았는데, 의외로 Faithlife 스터디 바이블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7:14 For God made one in place of another People should accept both good and bad situations in life, recognizing that they are dependent on God, not their circumstances (3:11). See note on 9:7–10.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7:14.

자기 계발서와 경영 서적을 좋아하기 때문에 미래를 탐구하고 예측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의 그러한 고민이 설교에 반영되었습니다

미래를 통제하기 위한 시도의 근본으로 들어가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설교를 풀어내고, 결국 여호와를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라고 논리를 전개하였습니다. 설교문을 준비하면서 마지막 부분의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문장들이 춤을 춘다고 느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책들이 잊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신기합니다. 어떤 책이 생각이 나고 인용하고 싶어서 펼치면, 그것들이 다시 마음 속에 되살아납니다. 마치 영혼 어딘가에 잠시 숨어 있다가, 부름을 받고 때가 되어 수줍은 얼굴을 내미는 같습니다. 싱크 어게인은 탁월한 책입니다. 사실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도 인용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그것은 접었습니다.

이번 설교는 평소보다 3 정도를 사용했습니다. 새벽이라 성도님들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논리적인 전개를 충분히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추가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소보다 말을 빨리해야 해서 너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오늘 설교의 내용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처럼, 바로 오늘의 설교가 인생의 마지막 설교일 수도 있기 때문에, 준비한 대로 최선을 다해서 설교했습니다.

오늘 설교 역시, 가장 먼저는 자신을 향한 설교입니다. 언젠가부터 마음 속에,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일 있다라는 생각이 너무 크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생각이지만, 때론 마음에 너무 부담이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루 하루를 의미 있게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시기를 간구할 뿐입니다. 그것이 저의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 전도서 7 1-14

현대 사회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를 생각해 본다면 "비교 의식에 빠진 사회"라고 말씀드릴 있겠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입었는지, 다른 사람을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지, 다른 사람이 어디에 휴가를 다녀 왔는지, 다른 사람이 어떤 집에 살고 있는지를 비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과거와 지금이 달라진 것은, 과거에는 기껏해야 자기 동네에서 안에서 비교하면서 살아갔다고 말한다면, 이제는 지구상의 인류가 나의 비교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떠서 눈을 감을 때까지 서로를 비교하고, 좌절감이나 혹은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비교라는 것은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면 수록, 자신 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것을 만족하지 못하고, 무한한 탐욕의 세계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 비교가 있는 반면에, 우리가 반드시 비교를 해야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와 같은 보통 사람의 특징은, 비교하지 말아야 것은 그렇게 집착하면서 비교를 하면서, 정작 비교를 해야 하는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오늘 말씀의 1절에서 6절까지는, 철저한 비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니좋은 이름, 다시 말해서 사람의 평판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 다시 말해서 많은 재산을 소유하는 것보다 낫다 이렇게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통 사람은 구입할 엄두도 못내는 초가의 향수를 뿌린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악취가 나는 평판을 향수로 감출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 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초상집이라는 내용이 3절과 4절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왕이면 잔치집에 가면 좋겠는데 굳이 초상집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고 하시는가? 언뜻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 안에는 깊은 지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떻게 살아가는가? 마치 내가 영원히 살아갈 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시간이 무한하고 나의 건강이 무한하고 무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백살 정도까지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장례식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현실을 가장 실감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바로 앞에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장에서는 물론 웃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곳은 슬픔과 근심을 가지고 마음이 숙연해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안에서 우리는 무슨 지혜를 얻게 되는가? 나의 역시 언제든지 이렇게 있다는 , 나의 죽음이 실제로는바로 나의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계발서를 읽어보면 배울 점이 많은 같습니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역으로 계산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를 계산하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프로젝트가 3개월 후에 있다면, 그때까지 남은 날짜를 가지고 역으로 계산해서 지금 무엇을 해야할지를 계획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의 끝을 분명하게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어야 현실을 의미있고 효율적으로 살아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태도를 계속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점과 생각을 가지고 우리에게 현재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시편 90 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0:12 우리에게 우리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무슨 의미인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마지막 날에 집중함으로써, 과연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부분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겉보기에는 비슷할 있을 같습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나의 성공을 위해서 혹은 삶의 효율성을 올리기 위해서 혹은 조금 의미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한다면, 우리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동기와 목적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는 주님 앞에서 신실한 자들로 살아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기를 바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 7-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의로우신 재판장이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을 믿고 붙들고 살았던 자신에게 면류관을 주실 것인데, 바로 그것처럼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의 상급을 준비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삶의 소중함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의 유한함을 깨닫고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며, 그분의 기쁨을 위하여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5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많은 학위를 가진 사람을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있습니다. 학교를 얼만큼 다녔는가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들을 아는 사람, 사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에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사실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가시나무를 태우면 순간 화려하고 열기가 있지만 금방 열기가 사그라 들고 사라지는 처럼, 어리석은 사람의 좋은 이야기들은 정말 헛되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에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의 가치를 알고 책망을 달게 듣고 경청하고 거기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바꿀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지혜자"라고 부를 있는 것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조직심리학 교수인 애덤 그랜트는, 자신의 "싱크 어게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을 평가하면서, 그들이 다양한 환경 속에서 변수 속에서 살았지만, 위대한 대통령들을 구별하는 일관된 요소를 발견하였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대통령을 구별하는 요소는 바로 지적 호기심과 개방성이었다. 그들은 폭넓은 주제로 독서를 했으며, 내치와 외교에 버금갈 정도로 생물학, 철학, 건축학, 그리고 음악 분야의 발전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들은 새로운 견해에 귀를 기울였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낡은 견해를 새롭게 고치는 관심을 쏟았다.” 라고 위대한 대통령의 공통된 특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마치 이런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허황된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참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낡고 편향되고 고집스러운 생각만을 주장하면서, 말씀을 기준으로 전혀 그것을 고치지 않는 어리석음을 평생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정말 성경이 요구하는 지혜의 수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열고, 말씀에 따라서 기꺼이 나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과정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 9절까지 말씀은, 우리의 지혜를 무너뜨리는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말씀 속에서, 탐욕과 뇌물로 표현되는 부패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혜들을 가지면서 교만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이정도로 지혜로운 사람이야, 그래 나는 정도로 탁월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라고 스스로를 종종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지혜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전혀 문제가 없다거나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삶에서 정의로움을 잃어버리고, 탐욕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누군가로부터 뇌물을 받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가 점점 무뎌지게 되는 것이고, 마지막에는 어떤 지혜도 없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으로 완전히 추락하여 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완전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추락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가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넘치는 타국의 여인들을 아내로 받아들였을 때에, 그는 결국 예루살렘 앞에 위에다가 우상을 산당을 지었습니다. 아내들이 우상들을 마음껏 섬기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가장 어리석은 자로 추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말씀은 엄청난 경고라고 말씀드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8절과 9절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부분에 있어서 지혜가 있다고 교만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앞에서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지금의 겉모습만 가지고 어떤 일을 판단하지 말고, 성급하게 분노하거나 감정적으로 요동칠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인내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현실의 문제에 제대로 직면하지 않고, 그저 예전이 좋았다라고 신세 한탄만 하고 있는 것으로는, 아무런 삶의 변화도 일으킬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지혜의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1절의 말씀이 표현이 멋진 말씀입니다.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2절에는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돈이 가지고 있는 효용성과 가치입니다. 제가 생각할 어떤 성도님들은 돈에 대한 극단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같습니다. 돈을 터부시하고 마치 그것에 대해서 언급하면 안되고, 돈을 추구하는 자체를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적인 시각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문제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돈을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면서 돈에 완전히 빠져서 끊임없는 탐욕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돈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이고 우리를 보호해 있는 중요한 수단이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렇게 중요한 돈보다 중요한 것이 지혜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12 하반절 말씀입니다. “지혜에 관한 지식이 유익함은 지혜가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참된 지혜라는 것은 돈의 가치를 완전히 뛰어넘는 것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가진다고 하더라도 참된 지혜를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죄인이 처한 비참한 현실과,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그분이 베푸신 구원에 대하여,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에 대하여 결코 돈은 알려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 3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감히 돈이 없는 영원한 생명과 의로움을, 참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죄인이 얻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세번의 명령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3절에보라”, 그리고 14절에기뻐하라, 되돌아 보아라 세번의 동사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와 같은 일반적인 인간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가? 아니면 슬픈 일이 일어나는가? 거기에만 온통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좋은 일이며, 많은 복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건강과 물질의 복을 넘치게 주시는 분이시며, 그렇게 하실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의 왜곡된 생각과 죄성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나에게 과연 좋은 일이 일어나는가 아닌가? 거기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보다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나에게 좋은 일이 있는가 아닌가? 그것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위대하신 전능하신 여호와를 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억할 것을 명령하시면서,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 삶의 두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은 고난이 일어날 수도 있고 형통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삶에 두가지 일이 모두 일어난다는 것을 확고한 진리로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병행하여서 함께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형통한 날에 진심으로 기뻐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복을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능력이나 운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내가 누리는 모든 형통이 왔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을 지나갈 때에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성경은되돌아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실 "되돌아보라" 라는 번역보다는, "생각하라, 깨달으라" 라는 번역이 좋은 번역입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는가? 14 하반절에 내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너무나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닥쳐오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어떤 생각부터 하는가? 혹시 내가 죄를 저질러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인가?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내가 잘못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이 지금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인생 그런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하나님의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데,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시고자 함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장래의 " 다시 말해서 미래입니다. 어떤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람의 인생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미래에 집착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의지할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미래를 조금이라도 확실히 예측할 있다면, 나의 삶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러한 갈망의 근본 속으로 들어간다면, 세상을 조금이라도 내가 뜻대로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와 미래를 지배함으로써 안정감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와 나의 미래라는 것을 철저하게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할 있고 준비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 환경이나 예측 가능한 미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요구입니다. 나를 믿는 불신앙에서 벗어나서, 참된 아버지이신 여호와 나의 삶을 책임지시며 이끌어가시는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115 9절과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5:9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5:1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그리고 시편 28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고 감사하며, 그분께 넘치는 찬양과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형통한 순간을 지나고 있다면, 여호와의 은혜를 인정하고 기뻐하며 그분께 감사를 올려드리기를 원합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의 때를 지나고 있다면, 그럴 때일 수록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붙들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시간을 통하여서 우리의 믿음이 새로워지고, 정금처럼 아름다워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을 기억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며 변화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고 주님을 다시 것을 믿고 기대하며, 오늘 하루를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형통한 날에 주님 안에서 기뻐하게 하시고 고난의 때에 더욱 주님 의지하고 붙드는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성도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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