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 전화 드리는 것은 저의 큰 기쁨입니다. 혈육의 관계를 넘어, 진실한 목회자의 감격과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허리가 많이 아프시다고 해서 걱정을 했습니다. 그렇게도 많이 다른 분들을 먹이고 심방 다니시느라 고생한 덕분입니다. 그나마 조금 나아지셨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서 마음이 들떠 계셨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줄 떡을 준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연약하고 돌봄을 받지 못하는 분들에게도 나눠줄 것이 있어서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설교의 내용이 어머니의 삶 속에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통해서, 이 땅에 기꺼이 오신 예수님의 뒷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은 영하 28도까지 떨어졌습니다. 최근에 하이웨이에서 타이어가 문제가 생겨서 멈춘적이 있었습니다. 업 친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시동까지 걸리지 않아서 많이 당황을 했습니다. 급격하게 떨어지는 온도 속에서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언뜻 했습니다. 그 경험 때문인지, 오늘 교회까지 가는 길이 적잖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사실 차 시동이 문제였습니다. 예전 차가 동일한 환경에서 시동을 걸었다가 엔진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차를 구입할 형편은 안되기에 시동을 거는데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저의 삶에 대한 고민의 무게와, 설교자의 설교의 무게를 잠시 비교해 보았습니다. 가는 길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고, 설교에 대한 기대와 뜨거움을 가지고 어두운 밤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짧은 본문이지만, 본문 자체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가지고 있는 요한 1서에 대한 주석을 아마 거의 다 살펴 본 듯 합니다. 복잡하게 연결되는 문장들의 구성 속에서, 문법적인 부분에서 논쟁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Exegetical Summary 조차 그 문제들을 다 다루지 못한다는 점에서 놀랐습니다. 보이스 목사님의 설교집에서도 문법적인 설명을 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것을 보면서 그 방향이 저의 방향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가지 해석에 대한 방향이 있을 때에, 설교자가 가지는 이해와 성경 읽기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19절이 많이 복잡했습니다. 다만 평소에 요한 1서를 읽으면서 제가 이해했던 방향으로 핵심을 짚어가며 설교했습니다. 그나마 Lutheran 주석이 핵심을 정리해주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 Hereby shall we know
that we are of the truth. Hereby, that is, if we love in “deed and truth,” this is
evidence that we are born of the truth, and of God. And
shall assure (persuade) our heart before him. This
evidence of brotherly love which establishes the fact that we
are born of the truth and of God, gives us also the assurance that we are
children of God. The heart is here conceived of as the seat of the whole
spiritual life as in James 5:8; 1 Pet. 3:4, and as the seat of consciousness of
the truth as in James 1:26. John here uses the word heart as
including the conscience, for it is the conscience which excites
and disquiets the heart, and which needs to be guided and pacified.
Revere F. Weidner, Annotations
on the General Epistles of James, Peter, John, and Jude, ed. Henry
Eyster Jacobs, vol. XI, The Lutheran Commentary (New York: The Christian
Literature Co., 1897), 311.
그리고 주석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굉장히 강조점을 두었고 칼빈의 경우에는 이것을 경고의 의미로 이해했다고 어느 주석에서 읽었습니다. 다만 저는, 또 다른 주석가들의 이해를 따라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방향으로 암시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형제에 대한 이해는 루터의 설명이 너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스터디 바이블이 루터 원전과 연결되어 있어서 너무 편리했습니다. 로고스 프로그램을, 그리고 루터란 스터디 바이블을 이용하는 큰 유익입니다.
3:18 Love is prompted and
proceeds from the truth and is carried out in actual deeds done for the benefit
and blessing of another. Whatever tends to our brother’s salvation is done “in truth.” Luth: “To love a brother who is kind
and pleasant in return—this
is a trivial matter. This is the way the world also loves. ‘The crowd judges friendships by
their usefulness.’ Accordingly,
John does not say: ‘Let
us love those who are saintly, agreeable, and rich.’ No, he says: ‘Let us love the brethren,’ in such a way that then
nothing but the brotherhood is loved and regarded; for a brother is loved out
of a sense of duty, not because of usefulness and not because of praise. All
the gifts we have should serve those who do not have them. For example, he who
is learned should serve him who is not learned; he who is rich should serve him
who is poor; he who is sensible should serve him who is foolish, etc.” (AE 30:278–79).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2177.
추가로 약간 무리를 해서 오래 전에 읽었던 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을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문장들이 너무 황홀 했습니다. 과연 제가 절반이라도 이해하고 읽고 있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이 예전보다는 조금 더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데이비드 플랫의 “복음이 울다”는 다시 한번 탁월하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연약한 자를 향한 그 마음의 공감이야 말로, 성도의 본질이며 성도가 가져야할 궁극적인 방향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방향에서 재물을 쓰는 것이야 말로 너무나 탁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최근에 들은 팀캘러 목사님의 어느 설교에서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요한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자신의 말씀 속에 두 번 언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과, 연약한 성도를 위한 마음과 그들의 기도를 동일 선상에 놓습니다. 이 부분이 너무 충격이었고 너무 좋았습니다.
너무 어렵게 준비한 설교였고, 교회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아서 많이 피곤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놀라운 특권이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이 뜨거운 것처럼, 성도님들도 그렇게 들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무엇보다 설교하는 제 자신이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 요한1서 3장 13-24절
성도님들께서는 혹시 누군가의 미움을 받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에 내가 잘못을 해서 누군가 나를 미워한다면, 그 원인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그나마 마음이 덜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미움을 받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그 사람의 마음은 크게 낙심할 것이고 너무나 슬퍼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는 두 그룹이라는 분명한 구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이라는 것은 주의 몸 된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고 "세상" 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편지를 받는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그들이 받는 미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사랑을 많이 베푸는데 왜 미움을 받는 것인가? 왜 나는 내가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미움을 받는 것인가? 내가 다른 이들을 구제하고 돕는데 왜 오히려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는 것인가? 이러한 마음에 의문과 또 어려운 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미워하여도" 라는 것은 매우 강하게 싫어하고 적대감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받는 그 미움이라는 것이 매우 비상식적인 것이고 불합리한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가 받는 미움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이상히 여기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어 번역들은 대부분 "놀라지 마라" 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말씀이 명령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의 놀라고 상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놀라지 말아라 그리고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놀라지 말아야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14절에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요한 사도께서는 두가지 점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첫째로 세상이 그렇게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그들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그들은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영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이라는 것은 단순히 살아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여호와를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서 죽어있던 영혼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생명을 얻으면서 이제서야 드디어 여호와를 섬기게 되는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진정한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영적인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그분을 우리의 삶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고 마귀의 손아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며 자신의 이기심과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성도를 미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맥을 가만히 보면, 약간의 내용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 사도 요한이 말씀하실 때에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너를 미워해도 놀라지 마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생명을 말씀하시면서 교회 공동체 안으로 그 말씀의 초점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14절에 보니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라고 말씀하십니다. 15절에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형제는 교회 안에 형제 자매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15절에 말씀은 굉장히 충격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교회 안에서 다시 말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제 자매를 미워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여기서 "미워한다"라는 그 동사가, 13절에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라는 동사와 동일한 동사이다 라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성도와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내면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세상 사람들이 그런 것 처럼 동일하게 생명이 있는자를 미워하며 핍박한다는 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려 그것을 비난하며 힐난하며 그 사람과 선행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언뜻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아니 굳이 왜 사랑을 베푸는 성도를 미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황당한 미움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요한 사도는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성도와 아닌 성도를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무엇인가?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는자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적잖이 놀랐던 것은 사랑이 가지고 있는 그 위치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 그것을 신앙의 그렇게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랑할 수 있으면 좋기는 한데, 그것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는 것이, 그리고 꾸준하게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이, 그리고 좋은 책들을 읽는 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아니다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먼저 중요한 것은 "사랑" 이라는 것이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는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바로 그 사람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은,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인가?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은 그 사람이 유용하다면 쓸만하다면 그 사람과 우정을 가지고자 합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말할 때에 신앙이 좋고 유쾌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를 사랑합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진정한 성도의 사랑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도 자신의 가족과 자신에게 힘이 되는 사람과 따뜻하고 친절하고 신앙이 좋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대상이 그런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에게 사랑의 대상이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형제라는 것은 나에게 유익을 주는 존재만이 아니라 사실상 우리의 도움을 필요하는 가장 연약한 자들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심각하게 질문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목사님께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분명히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힘이 되고 아름답고 예쁘고 돈이 많고 저의 뒷배경을 될 만한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까?
저는 충분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심각하게 질문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이신 그 사랑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사랑과는 사실상 완전히 반대의 지점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책 네가지 사랑에서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채움을 필요로 하는 어떤 욕망이 없으며 다만 주고자 하는 풍부함이 있을 뿐입니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다른 이에게 주고자 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참된 사랑을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라는 존재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예수님께서는, 사랑스럽고 가까이 하고 싶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을 미워하고 온통 자기 밖에 모르는 죄인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받은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연약하고 볼품 없고 가치 없는 자에게 주어진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고백하고,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고, 그분이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참된 자녀가 되었다면 가장 연약한 자에게 베푸는 사랑을 가져야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의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16절부터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누군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16절과 17절이 연속된 말씀이라는 것이 너무 흥미롭다고 느껴졌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재물을 위하여 사람을 속이고 사람을 해치는 시대입니다. 돈 때문에 가족이 깨어지고 돈 때문에 친구가 원수가 되는 시대입니다.
지구 전체 인구는 70억명을 돌파했습니다. 그러나 2008년 1월에 발행된 한 의학 전문지에서는, 전세계 5살 이하 어린이 사망 원인의 35퍼센트가 굶주림에 따른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돈이야 말로 우리의 목숨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흥미로운 것이, 사람들이 사랑을 베푸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을 매우 추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로 어려운 형제를 도와준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작은 물질이 사랑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물일 수도 있고 음식일 수도 있고 따뜻한 밥 한끼일 수도 있고 차 한잔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의 그 베푸신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이, 가장 연약한 자를 향한 신의 그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의 두 손과 우리의 물질과 우리의 베푸는 것을 통하여 어둡고 소망 없는 이 세상 속에 흘러 들어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앞부분의 말씀도 참으로 놀랍지만, 뒷 부분의 말씀은 더 놀랍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가 마땅히 형제를 도와야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리고 그렇게 도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된다는 것을 19절과 20절 그리고 22절에 말씀하십니다.
먼저 19절과 20절입니다.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 가운데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얻는가? 거기에 대해서 모두가 관심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과연 무엇을 통해 확신할 수 있는가?
로마서 10장 9절에 말씀하십니다.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다면,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주인으로 고백한다면,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의 내면이 감정이 많이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이후에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죄들과 실패와 연약한 부분들이 끊임 없이 우리를 연약하게 만들고 구원을 의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가 삶 속에서 행했던 그 진실한 순수한 그 사랑이, 우리가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그 확신을 우리 마음에 심어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말로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복받치는 감격입니다.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부터 솟아오르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즐거움입니다.
우리가 정말 연약한 자들에게 우리의 손을 내밀 때에, 내가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상대방을 위하여 수고를 할 때에, 부족한 나의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어서 누군가에게 아낌 없이 베풀 때에, 바로 그 사실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하나님의 그 진실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구나,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는 것이구나,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 것이구나”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진실한 사랑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 구원에 대한 확신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 생활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성도의 참된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 속에 무엇이 가득한 것인가? 형제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물론 성도도 여전히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완벽하다 하나도 흠이 없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도 이기심도 있고 자신에 대한 연민과 분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형제를 향한 진실한 사랑으로 가득해져 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 그의 삶의 전체의 방향성을 주장하는 그것이 바로 형제를 향한 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가 어떤 기도를 하겠습니까? 연약한 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스스로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 영적으로 연약해져서 지쳐버린 사람들,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서 외로움에 사무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실제로 행동하고 움직일 뿐만 아니라 당연히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기대하며 갈망하며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어떻게 들으시겠는가? 너무나 기뻐하실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2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기뻐한다” 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 가운데 행하셨던 바로 그 모든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정말 놀라운 말씀이지 않은가?
진실한 사랑으로 행하는 연약한 형제를 위한 그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전히 이루신 이 땅에서의 그 구원의 일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기도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중보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영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근 몇년 동안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제 마음을 움직였던 책은 "복음이 울다" 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저자인 데이빗 플랫 목사님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책의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지난 수많은 예배들을 돌아보면 나와 우리 교인들이 식수나 식량이 절대적으로 모자란 사람들, 소중한 가족과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함께 눈물을 흘렸던 순간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토록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며 가슴 아파 우는 일에 인색한 것일까?”
저와 성도님들의 삶과 내면은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내면을 다시 한번 살펴 볼 수 있는 귀한 믿음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살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이 힘차게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사용하는 그 대상이 과연 연약한 형제 자매들인지를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는 대상이 힘 있고 능력이 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가장 연약한 자들인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다시 한번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하고, 우리의 기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워지는 모든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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