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그런 생각을 합니다. “충분할 만큼 능력이 많았으면 좋겠다.”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항상 한정된 능력과 자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정된 시간에 만족할 만한 수준의 설교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결국 삶의 다른 어떤 곳이 허점이 생깁니다. 그래서 항상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누구에게도,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첫째로는, 설교를 실제로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설교자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설교자의 마음과 고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어떤 공감대를 가질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다른 사람에게 굳이 말을 꺼내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이미 제가 정리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와 같은 마음으로 함께 고민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미 이 글을 읽으시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충분합니다. 설교를 함께 고민하는 어떤 분이 이 글을 읽고 함께 저와 고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저에게는 기쁨입니다.
이번 설교는, 굉장히 까다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잘 다루어지지 않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본문의 내용 안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앞과 훨씬 뒤를 충분히 살펴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조인 다윗에 대하여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부담이 됩니다. 정말 제가 이해한 것이 성경적인 것일까? 이미 충분히 고민한 부분들이지만 다른 주석가들도 지지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이번 설교에서도 다양한 자료들을 참조하였습니다. 시므이의 행동이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취한 행동의 시기적인 맥락 속에서, 그의 회개의 진심에 대해서도 한번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19:17 a thousand men
were with him from Benjamin Shimei may be attempting to show his influence to David
in hopes that the king will let him live. Shimei influenced 1,000 men to
welcome David back, proving that he could be a valuable ally.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삼하 19:17.
흥미롭게도, “다윗이 과연 복수심을 가졌는가 가지지 않았는가”에 대해서 대부분의 스터디 바이블들이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주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적극적으로 해석하기에 부담이 되었든지 혹은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안았던 것은 아닌가 추측을 합니다.
19:16–23 At the Jordan (see v. 15), David meets
various people he had encountered during his flight from Jerusalem. The first
of these is Shimei, who had cursed him as he fled (16:5–13). Now that the Lord
has repaid David with good for his patience under Shimei’s cursing (16:12), Abishai thinks Shimei should be put to death as he deserves. But David wants this
to be a day of rejoicing, not retribution. However he apparently did not fully
forgive Shimei (cf. 1 Kings 2:8–9, 36–46).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73.
NAC
주석에서, 다윗이 완전히 용서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Reformed
계열의 또 다른 주석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으로 다윗을 긍정적으로 평가 했는데, 저는 신학적인 접근 보다는 일단 본문 자체가 지지하는 방향을 더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8–9 On the other hand, Shimei, the pro-Saul
Benjamite who cursed David when he fled from Absalom (2 Sam 16:5–14), must be
dealt with in a different manner. David admits that he swore not to kill
Shimei, yet he encourages Solomon to find a shrewd way to “bring his gray head
down to the grave in blood.” Certainly David does have personal revenge on his
mind, but killing Shimei also lets the populace know that pro-Saul, anti-David
sentiments will not be tolerated. Thus, David has told his successor how to
reduce the risk that old factions will mount challenges to his authority.
Paul R. House, 1, 2 Kings, vol. 8,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98.
요즘에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계속 들으면서, 마치 설교의
흐름이 어떤 거대한 목표를 향해서 전진해나가는 듯한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물론 분명히 구별된 문단과, 문단 하나 하나 사이의 흐름을 가지지만, 그분의 설교는 어떤 선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설교에서, 이렇게까지 처음부터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구성해 본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의 불완전한 용서와, 하나님의
절대 용서의 대조라는 구조를 찾은 이후로는, 모든 내용과 흐름을 거기에 온전히 맞추고,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드러내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므이가 누구인가, 시므이가 한 저주의 내용이 무엇인가, 다윗이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가
등등에 세부적으로 분석하면서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물흐르듯이 내용이 흘러가면서 십자가로
그 모든 방향이 향하도록 내용을 조절했습니다.
그리고 매번 사용하지는 않지만, 인용한 하나님의 인내 그리고
죄를 간과하시는 그 용서에 대한 로마서 말씀을 이해할 때에 UBS Handbook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God … was patient (literally “because of God’s patience”)
comes from verse 26, where it concludes the clause begun in this verse.
However, for English readers it more naturally comes first in the clause, and
so it is placed there by the TEV (see also NEB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overlooked the sins of the past”). Although it is possible that the verb
rendered overlooked may instead mean
“forgave” (see Phillips “by the wiping out of the sins of the past”), there
seems to be very little support for that interpretation here. If Paul wanted to
say that God has forgiven the sins of the past, he could easily have done so
and make himself clear to his readers.
Barclay Moon Newman and Eugene Albert Nida, A Handbook on Paul’s Letter to the Romans,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3), 69.
또 한편의 설교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감사하고 마음이 뿌듯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성도님들과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감사와 감격을 오직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 사무엘하 19장 16-23절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앞 부분에서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잃어서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압을 통해서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기 때문에, 그가 마땅히 해야할 일들과 그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드디어 마음을 가다듬고 새롭게 왕의 모습과 태도를 갖추었습니다. 압살롬으로 인해서 마음이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다윗을 향하여 마음이 모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드디어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요단 강까지 돌아왔을 때에, 유다 사람들이 길갈로 나와서 왕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이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 것을 도와주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누가 등장하는가? 오늘 말씀 16절에 시므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시므이가 누구인가? 시므이라는 사람은 사무엘하 16장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 때에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시므이는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사울의 친척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향해서 돌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매우 심하게 저주했습니다.
그 저주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다윗 너는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흘리게한 사악한 자다, 그리고 사울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너에게 돌리셨다” 이렇게 다윗을 심하게 저주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다윗은 인내하면서 그것을 그저 잠잠히 들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 처럼,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다윗의 책임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이의 말은 거짓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가 받는 억울한 저주에 대해서 더 이상 시므이를 탓하거나 그를 벌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어려움이라고 여겼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이전에 시므이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도망하던 다윗의 등에 칼을 꽂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실의 여부와 전혀 상관 없이 다윗을 저주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황급히 도망하는 왕을 비난하고 욕보이기를 주저하지 않던 진정한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다윗을 처참하게 저주하며 비웃던 시므이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로 오늘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시점은 어떤 시점인가? 다윗의 대적이 다 없어지고 이제는 그가 다시 온 나라의 왕으로 회복되려 할 때에 다윗이 돌아오는 길에 시므이가 급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니,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시므이는 단순히 온 것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지 다윗에게 보이면서 그가 자신을 받아 주기를 바라면서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므이라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있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윗 왕이 다시 왕으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의 세력을 모두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 앞에 바짝 엎드린 것입니다. 19절부터 그가 얼마나 절절하게 용서를 구하는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어떻게 부르는가? "내 주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자신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말아 주시고 왕의 마음에 두지 말아 주십시요, 내가 범죄한 줄 알기 때문에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합니다” 라고 간절히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들은 과연 시므이를 어떻게 평가하실 수 있겠는가? 사실 이 사람은 굉장히 얄미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다윗이 모든 권력을 잃고 도망할 때에는, 그를 심하게 잔인하게 저주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자 득달같이 달려와서 그 앞에 엎드려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황당하기도 하고 화도 났는지, 아비새 장군이 당장 죽여야 한다고 다윗에게 건의했습니다. 그가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22절에 보니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라고 아비새 장군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아비새의 말이 다윗을 위해서 그가 다윗의 편에서 말하는 것 같았지만 아비새의 생각이 전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 자신이 이제 겨우 온전한 왕으로 다시 복귀하려고 하는데, 지금 시므이를 죽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는 의미로 그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윗이 시므이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너를 죽이지 않겠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아주 흥미로운 것은, 이 중요한 스토리와 인물들의 대사 안에서 행간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이지 않는 어떤 내면의 움직임들을 말씀이 분명히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겉으로 볼 때에 시므이의 회개라는 것은 진심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겉으로 볼 때에는 완벽한 회개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이라는 것이 참 미묘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가만히 있다가, 다윗이 왕으로 당당하게 돌아오는 바로 이 시점에서야 이제는 감히 그가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에야, 시므이가 다윗 앞에 납작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번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정말 시므이는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일까? 혹시라도 시므이는 단순히 돌아가는 상황에 굴복해서, 단지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엎드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를 처단했을 경우에 베냐민 지파가 돌아설 것을 은근히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모아서 무력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윗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오늘 말씀이 약간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특별히 다윗의 용서라는 것이 약간 찜찜한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어찌되었든 지금 다윗 앞에 시므이가 찾아왔고 이렇게 앞에 엎드려서 간절히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혹시 위선적으로 회개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겉으로 볼 때에는 간절한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면서 “제발 용서해 달라고, 나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달라고, 죄를 나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적어도 이 정도는 다윗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 시므이야 너가 나를 저주한 것은 크나큰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를 모욕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나도 너를 용서하고 하나님께서 너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란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겨우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죽여야 되는 것 아니냐고 난리를 치는 아비새에게 말하기를, “아비새여 오늘 사람을 왜 죽이는가?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시므이가 죽지 않은 것은, 그리고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그가 진심으로 시므이를 용서했다기보다는 자신이 왕으로 복귀했다는 이 시점에 있어서 더 이상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정치적인 고려가 훨씬 크게 들어간 것이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과 시므이 사이의 그 긴장, 혹은 완전하지 않은 다윗의 용서에 대한 그 긴장은 성경에 다시 한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죽을 때가 되어서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길 때에, 시므이의 이름이 다시 한번 등장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장 8절과 9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8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그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악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그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므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9 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이 내용이 어떻게 이해가 되십니까? 놀랍게도 죽음을 앞둔 다윗의 그 기억 속에는, 시므이가 자신의 앞에 엎드려서 간절히 호소했던 회개와 생명에 대한 호소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므로” 그리고 나서 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 “자신이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새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맹세 때문에 자신이 그를 죽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솔로몬에게 그를 죽일 것을 은연 중에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굉장히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시므이의 그 심중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리고 다윗의 그 감추어진 심중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본문을 주의 깊게 보면서 결론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것은, 다윗은 시므이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은 훨씬 뛰어넘은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저 같으면 제가 왕궁을 버리고 눈물로 도망가는데 그렇게 저주했다면 정말 그를 살려두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제가 다시 왕궁으로 복귀하는데 그가 나타났다면, 내가 너를 죽이지 않겠다 라는 그런 맹세는 절대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전히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죽음의 그 침상 속에서도, 시므이의 죄와 자신이 받은 치욕을 결코 잊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보여준 용서라는 것은 진심으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하게는 용서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모욕을 갚아 줄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 라는 말을 들을 때에 어떤 느낌으로 어떤 감정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우리들의 마음 속에 많은 의구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말씀을 듣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가 딱 우리의 수준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용서 한다고 말하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잊었다고 말하면서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겉으로는 너를 해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어떻게든 그 틈을 찾아서 해칠 방도를 자기도 모르게 찾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셨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잊었다고 말씀하시지만 잊지 않으시고 그대로 갚으시며, 해치지 않겠다고 말하지시지만 언제든지 나를 해칠 수 있는 무서운 적과 같은 분으로 그분을 여전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가 하나님을 대할 때에 가지고 있는 정서적이고 신학적인 실제적인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그 절대적인 용서를 바라보고 또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자신을 저주하고 괴롭게 한 시므이를 용서하지 못한 다윗이지만, 오히려 그는 시편 25편 6절과 7절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내면에서 완전한 용서를 이룰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의 죄악과 허물을 분명히 알고 인정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그 부족함과 죄악을 가지고 누구를 향해서 호소해야하는 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시므이가 자신의 죄악을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한 것 처럼, 다윗 역시 자신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그분의 긍휼과 인자를 가지고, 그 인자하심을 통해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호와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어디에 나타나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다윗도 시므이도 여기 모인 우리도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는 심중에 죄악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원수를 갚고야 마는 악한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아 마땅한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십자가의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참으시는 분이 아니라 길이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렇게 참으시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그리스도의 눈물, 그리스도의 순종, 그리스도의 사랑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를 참으시는 것입니다. 참으시는 중에 죄를 간과하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시므이는, 다윗의 발 아래 엎드려서 떨면서 제발 자신의 죄를 잊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이 당한 모욕과 수치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지고, 스스로 수치를 지셨으며 스스로 모욕을 당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의 지은 모든 죄들을 더 이상 주목하시지 않으시는 것으로 더 이상 그것을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그것을 완전히 용서하신다며 우리에게 선포하시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 46절 그리고 48절입니다.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이라는 것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기준과 우리의 틀을 완전히 뛰어넘는 신성한 것입니다.
오늘의 다윗의 모습 속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어쩌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하며 잠 못 이루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절대 용서를 받은 자로서 그것을 누리는 자로서 내가 너에게 베푼 절대 용서를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베푼 그 은혜의 깊이와 무게를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지금 나의 바로 옆에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온 세상에 가득한 그 원수를 향해서 그를 기꺼이 용서하며 사랑의 손길을 내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이,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큰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절대 용서가, 우리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감격과 은혜로 부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가 우리에게 참으로 명예로운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그렇게 용납하셨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며 원수에게조차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세상을 거스리는 믿음을 가진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주신 절대 용서에 감사드립니다, 그 놀라운 용서와 은혜를 깊이 깨달아 알며, 그 안에서 기쁨과 평안과 감격을 매일 누리는 복된 성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절대 용서와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시며, 또한 그렇게 은혜 베푸는 자로 불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그것을 붙들고 원수조차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기준과 주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복된 주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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