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바이블은, 1절의 "천사들"로 번역된 단어들이 3절에 야곱의 "사자"와 동일한 단어임을 주목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야곱에게 오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천사들을 야곱에게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은 처음부터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온전히 개입하고 계심을 선언하고 시작합니다.
야곱이 자신의 사자들을 먼저 에서에게 보내었지만, 에서가 사백명을 거느리고 야곱에게 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에게 공포와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답답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저는 사람의 심리적인 부분에 관심이 큽니다. 에서가 사람들을 이끌고 야곱에게 찾아올 때에,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그를 완전히 뒤덮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을 세웁니다. 가족과 재산을 때를 나누어서 살릴 수 있다면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고 많은 선물을 보내서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단순히 전략만 세우고 실행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야곱은 처음으로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인자하심 때문에 많은 가족과 재물을 가지고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고 고백하며 에서의 손에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간구합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야곱이 얼마나 살기 위해서 치밀하게 전략을 세웠는지 성경이 그것을 세세하게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 32장은 눈여겨 볼만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묵상과 연구와 시간이 필요한 부분들입니다.
예를들어, 11절에서 야곱이 에서를 두려워한다고 할 때에 두렵다라는 표현은, 성경의 대부분에서 여호와를 경외할 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예물로 형의 감정을 풀겠다라고 말할 때에, 푼다는 단어는 속죄의 의미로 성경의 대부분에 사용됩니다. 성경 이해는 가장 근접한 그 단어의 컨텍스트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모세 오경의 맥락에서 보자면, 마치 야곱의 선물의 한계를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두려워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수준으로 에서를 두려워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야곱에게 에서는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로 나타납니다. 야곱은 에서를 누드러뜨리기 위해서 형의 감정을 풀기 위해서 예물을 보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 야곱에게 두려워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모든 예물을 드릴 분은 여호와임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무리한 해석일까요?
저는 야곱이 너무 이해가 됩니다. 자신의 삶에 결정적인 생명의 위협 혹은 안전의 위협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야곱을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두려워하며 답답해하는 야곱을 당연히 이해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야곱과 다른 듯 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삶의 목표이지만, 하나님의 목표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십니다. 이미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도망 중에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가까이 그에게 찾아오십니다. 심지어 그와 씨름을 하십니다.
이미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도대체 여기에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기억하는 것 처럼, 처음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속여서 쟁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이제 얍복 나루에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십니다. 하지만 야곱은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굳이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물어보십니다. 속이는 자였던 야곱은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얍복 나루에서 야곱은, 자신이 속이는 자였음을 어쩔 수 없이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사람과 하나님을 이겼다고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져 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야곱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조건이 없고 이유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야곱에게 지신 것 아닐까요? 물론 인간의 표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마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지신 것 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곱의 입장에서 그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야곱의 승복이 필요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반드시 인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인정하고 고백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은 하나님을 이겼다라는 뜻이지만, 실제 그 내용은 야곱이 하나님께 진 것입니다. 이제서야 진실로 하나님께 엎드린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충만하게 새롭게 받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에서의 위협은 변한 것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야곱의 정체성이 완전히 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참된 변화는, 자신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평생동안 본질적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본질적으로 죄인인 나에게 기꺼히 져 주신 하나님, 그분께서 나를 이미 사랑하셨고, 여전히 사랑하시고, 앞으로도 사랑하실 것이라는 것을 더 깊이 알아가고 깨닫고 경험하는 것이 성화인 듯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은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고 하나님께 엎드리고 주님께 더욱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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