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결과물이, 추상적으로 들려졌으면 하는 바램을 종종 가집니다. 말씀을 주해하고 그것을 적용한다는 것이, 그저 뜬 구름 잡는 이야기로 결론지어지기를 바랄 때도 종종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실질적으로는 너무나 큰 변화와 고통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말씀을 만나게 되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를 하는 제 자신 조차도, 변화와 고통을 경험하기 보다는, 그저 적당하게 덮고 넘어가는 것을 원할 때가 참 많습니다.
성경은 경제를 다룹니다. 돈의 문제와 정의로운 경제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시며 탐욕을 가지고 다른 이를 핍박하고 사치를 누리는 자에게는 정말 무서운 진노를 쏟아 내십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겁날 정도입니다. 과연 우리 중에 이 말씀 앞에서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얼마전에 목회자들이 가진 모임에서, "아는 것은 많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구체적으로 실천 방법을 모른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크게 공감하면서도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백퍼센트 동의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마치 닭이 먼저이냐, 알이 먼저이냐의 문제로 들리지만, 저는 "실천"이라는 것은, "직접 실천을 하면서 그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실천을 늘게 하는 것은, 실천의 반복되는 연습이지, 실천을 위해서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전거를 잘 타기 위해서는, 자전거를 타는 법에 대한 책은 두번 정도 읽어보면 됩니다. 오히려 자전거에 올라가서 타봐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어쩌면 공부는 충분히 했지만, 실천의 연습이 없었기 때문에 실천을 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설교 역시 주해를 목적으로 설교를 준비한다면 결국 결과물은 주해의 나열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용을 목적으로 설교를 준비한다면, 적용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나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이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을 붙들고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주권 중심의 설교가 참으로 성경적이지만, 동시에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가 성도의 마음에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삶에서 바꿔나가야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경제라는 것은 매우 복합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반드시 공부하고 또 그것의 실천의 방향을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임금을 주는 사람으로, 또 누군가로부터 임금을 받는 사람으로, 그리고 자본가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제의 구조와 돈의 흐름이라는 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와 직결된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 기업의 CEO가 천문학적인 재산을 소유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최저 시급 이하를 주기를 고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수 많은 헌신과 노력을 통해서 기업의 부를 쌓지만, 그 부라는 것이 소수에게만 편중이 되고, 그것을 마치 CEO라는 사람이 누려야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정의롭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정의가 힘을 잃고 나의 욕심과 탐욕이 힘을 발휘하는 세상입니다.
세탁소를 운영하시는 한 성도님께서 팬데믹 기간을 지나면서 어떻게든 직원을 보호하고 함께 살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를 나눠주셨습니다. 마음이 뭉클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분의 삶 가운데, 그 사업장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구입했던 "한국 자본주의"를 다시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언제인지가 될 지 모르지만 담임 목회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책 전체를 마무리 하고 좀 더 저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성경적인 관점을 찾아가야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결단과 실천의 과정 속에서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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