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를 설교하면서 삶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말씀 앞에서 나의 삶을 돌아보고 그 방향을 점검하고 제대로 잡아가는 것은 너무나 큰 유익이며 설교자로서 말씀을 대할 때에 큰 특권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평소에 읽었던 혹은 읽고 있는 책들이 자꾸 떠오릅니다. 원래 새벽에는 한권 정도만 인용하지만, 이번 설교에서는 두 권을 인용하였습니다. 일반 은총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의 조각들입니다.
최근에 몇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설교의 무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의 고충을 이야기 나누었을 때에 힘을 좀 더 빼는 것이 좋겠다라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너무나 귀하고 지혜로운 조언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로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저의 개인적인 강의나 소견을 발표하는 자리라면, 좀 더 힘을 빼고 조금은 더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설교자로 선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두려운 일입니다. 단순히 설교를 잘해야 한다라는 맥락을 넘어서서, 설교 자체가 주는 그 무게감이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지난 주 새벽 설교는 너무 내용이 많았습니다. 줄이기에는 논리가 너무 약해져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말이 너무 빨라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무난하게 설교를 준비해야겠다 잠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팀켈러 목사님 설교를 계속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새벽 설교도 짧은 그 시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진지하게 전해져야 합니다. 제가 능력은 부족할지언정, 저의 준비와 태도는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요즘에 저는, 해석이 왜 이렇게 되는가를 그렇게 많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설교의 자리는 해석학의 강의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충분히 소화하고 간단하여 영어 성경 혹은 현대어 성경 정도를 사용해서 내용을 이끌어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성도님들이 이해하실 때에 훨씬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는 듯 합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스터디 바이블들이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용이 정말 번뜩이는 내용들로 가득하다고 느꼈습니다. 왕이 어리다 라는 부분에서는 영어 성경을 인용했지만, 그 내용은 넷바이블 각주를 참조한 것입니다. 이미 사용하는 스터디 바이블들을 충분히 읽어보고 설교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습니다.
10:14 Who … after him: This rhetorical question
about the fool’s lack of knowledge about the
future is one of the repeated themes of Ecclesiastes. The same question is
asked in 3:22; 6:12; 8:7; in part in 9:12; and especially in the grand
conclusion of 12:14.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전 10:14.
tn Or “a child”; or “a servant.” The term נַעַר (na’ar) has a wide range of meanings
(HALOT 707 s.v. נַעַר; BDB 654–55 s.v. II נַעַר). Used in reference to age, it
may refer to an infant (Exod 2:6; Judg 13:5; 1 Sam 1:22; 4:21; 2 Sam 12:16), a
child just weaned (1 Sam 1:24), an adolescent in puberty (1 Sam 16:11), or a
young man of marriageable age (Gen 34:19; 2 Sam 14:21; 18:5, 12). Its technical
or titular use denotes “servant” (Num 22:22; Judg 7:10–11; 19:3; 1 Sam 3:9; 2 Sam 16:1;
2 Kgs 4:12, 25; 19:6), “retainer;
attendant; follower”
(Gen 14:24; 1 Sam 25:5; 2 Sam 2:14; 2 Kgs 19:6; Isa 37:6; Job 1:15–17; Neh 4:10, 17) and “soldier” (1 Kgs 20:15–16). The parallel Ugaritic term
is used in reference to physical age (lad; son; youth) and in a technical sense
(guild members; servitors; soldiers); see UT 19.445. The LXX rendered it with νεώτερος (neōteros, “youthful”). The English versions vary: “child,” (KJV, ASV, NASB, MLB, RSV, NRSV
margin, NIV margin); “childish” (NIV margin); “servant” or “slave” (NEB, NAB, ASV margin, NRSV,
NIV); and “lackey” (NJPS). When used in reference
to rulers, it emphasizes incompetence, naiveté, inexperience, and immaturity
(Isa 3:4, 9; 1 Kgs 3:7). This use must be understood in the light of the
parallel antonym: “son
of freemen” (בֶּן־חוֹרִים, ben-khorim). This suggests “servant,” that is, one who was not well
trained and prepared by noble birth to ascend to the throne.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10:16 king is a child. A
child ruler or a ruler acting childishly. Such rulers seek to satisfy their own
needs before attending to the needs of the people. This is not the “poor and wise youth” of 4:13.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1062.
제가 자주 사용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자료에는 오늘 본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묵상하면서 가장 완전한 은혜의 언어, 그리고 가장 완전한 리더십이라는 측면에서 예수님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요즘에 팀켈러 목사님 설교를 계속 공부하면서 얻은 일종의 감각이라고도 느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묵상하는데 마음이 벅찼습니다. 제가 감격하고 좋았던 만큼, 함께 들으시는 성도님들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소망하면서 원고를 준비하였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제 자신이 먼저 첫번째 회중이며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저의 평생에 언어가 은혜롭고 사랑과 격려가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리더십이 섬기는 리더십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저 역시 그 길을 힘있게 걸어가겠습니다.
* 전도서 10장 12-20절
전도서의 구조 안에서 오늘 말씀을 본다면, 인간의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지혜가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언어에 대한 지혜 그리고 리더십에 대한 지혜 이 두가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12절과 13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13 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말과 언어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시는가? 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지혜로운가 아닌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언어라는 것이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과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려주시면서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이상으로 우리의 언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우리의 언어라는 것이 두가지의 극단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12절에 보니 “언어라는 것은 은혜로울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은혜라는 것은, 더 힘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자비로운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조건 없는 호의를 표현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쓰는 언어라는 것이 얼마든지 그러한 놀라운 의미와 거대한 힘을 담을 수 있다고 오늘 말씀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정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롭지 않은 언어들은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 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삼킨다” 그리고 13절 말씀들은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들은 굉장히 강한 표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 말씀을 놓고 보면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목사님 이건 좀 과장법이 아닐까요? 사람의 언어라는 것이 그저 몇마디 밖으로 나오는 것에 불과한데 그것이 자기를 삼키고 그 결말이 미친 것이고 혹은 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궁금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정말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 처럼 언어가 은혜라는 큰 힘을 끼칠 수 있는 것이고 혹은 자신을 삼키며 너무나 악한 것으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일까?
제가 읽었던 책 중에서 언어라는 맥락에서 가장 통찰력이 있었던 책은, "무례함의 비용" 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저자인 크리스틴 포래스라는 분은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MBA 과정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분은 원래 엘리트 운동선수 출신인데 처음에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에 입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막말과 무례한 행동이 판치는 조직 문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를 시작하는데, 무례함이라는 것이 인간과 조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20년 넘게 연구하였습니다.
그중에 몇가지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의사와 간호사 45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무려 71퍼센트가 상대방을 깔아뭉개거나 모욕하는 언행을 경험했을 때에, 그것이 자신의 의료적 실수와 관련이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중에 27퍼센트는, 무례한 언행과 자신이 돌보던 환자의 죽음 사이에 관련이 있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내과 병원장 800명을 설문조사 했더니 그 중에서 99퍼센트의 응답자는 말하기를, 자기 병원에서 발생하는 무례한 언행이 환자를 치료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대답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례함은 우리 모두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간다, 우리를 감정적 롤러코스터 상태에 빠뜨린다, 우리의 인지능력을 빨아들인다, 심지어 정신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산산이 부서져 극도로 위축되고 평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악한 말들을 밖으로 내는 것이고, 그 악한 말들은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수준에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과 공동체를 망친다는 것을 연구 결과들이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매한 자의 언어는 또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매한 자는 말이 많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슨 말이 많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뒷 부분에 거기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습니다.
우매한 자가 하는 말의 내용이 무엇인가?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매한 자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모르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처럼, 마치 미래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는 것 처럼 교만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은 참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15 우매한 자들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라 그들은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NLT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약간의 일만해도 지쳐버려서 심지어 집에 가는 길조차 찾을 수가 없다” 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힘과 시간이라는 것은 한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쓸데 없는 교만한 말들만 하다가 힘을 다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작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허망하게 힘을 다 소진하여 버려서,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조차도 찾지 못하는 일상의 생활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참으로 큰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무례하고 악한 말을 내 뱉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사람을 격려하고 살리고 돕는 언어야 말로 가장 지혜로운 언어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지혜라는 것은 교만하여서 자신의 손에 미래가 달린 것 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쓸데 없이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실천하는데 힘쓰는 것이 참된 지혜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6절부터는 장면이 전환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리더십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공동체에서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리더가 지혜로운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에서 강조해서 보여주시는 것은 지도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니 왕은 어리다 그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리다" 라는 것은 단순히 나이가 어리다기 보다는 그 마음과 생각과 태도가 굉장히 어린아이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는 어떤 존재인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돌아보는 것이 어린아이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지 않는 것이 어린아이입니다.
만약에 공동체의 리더들 가운데 그런 분위기가 팽배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왕은 자신이 최고 지도자인데 자기 생각만 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먹고 즐기는데만 관심을 가진다면 도대체 그 공동체가 어떻게 되겠는가? 너무나 슬픈 일이고 너무나 끔찍한 일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리더십은 어떤 리더십인가 17절에 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왕은 귀족들의 아들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지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번역할 때에 “왕이 성숙한 사람이다”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앞에서 등장한 어린이와 같은 왕과 비교되는 적절한 표현입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만 내세우고 자기의 필요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알고 타인의 필요를 알고 공동체 전체를 돌보는 그런 성숙한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서 함께 일하는 이들은 어떠한가? 17절에 보니, 취하지 아니하고 기력을 보하려고 정한 때에 먹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은 인간의 즐거움에 대해서 절대로 완전히 금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즐거움을 없애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우선 순위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리더의 책임감입니다. 자신이 할 일을 망각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리더이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미루지 않고 먼저 하는 사람이 리더이고, 그 이후에 자신들의 즐거움을 필요한 만큼만 누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학부가 행정학 전공이기 때문에, 조직과 리더십에 대한 책들을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 최근에 읽었던 가장 좋은 책은 "어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라는 책입니다. 원래 영어 제목은 leading matters 라는 제목인데 처음에는 한국어 제목이 참 특이하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 비춰보면서 생각해 보니, 어른다운 성숙한 리더십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쓴 존 헤네시는, 무려 16년 동안 스탠퍼드 대학의 총장을 역임한 사람입니다. 이분은 과학자로 벤처 사업가로 총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모든 생각들을 이 책에 정리하였습니다.
저자는 리더십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많은 권력가나 권위자가 가장 배우기 힘들어 하는 것 그리고 일부는 평생 배우지 못하는 것이 바로 리더십은 봉사라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리더의 거의 모든 측면이 봉사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리더는 전형적으로 다른 구성원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결정을 우선시한다. 그런 상황에서 리더로서 당신의 역할은 구성원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란 사실을 떠올리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려면 머릿속으로 조직도를 뒤집어 당신이 서 있는 피라미드의 정점이 맨 아래로 내려가 나머지 사람들을 떠받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자각하고 봉사하는 리더로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조직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이끄는 공동체와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리더로서 실패하게 될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내용을 읽으면서 참으로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을 가장 높은 자리에서 이끌면서 저자가 배운 것은, 리더십의 본질은 섬기는 자리이고 리더란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신이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살피는 섬기는 자리라고 단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성경이 요구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리더십을 평범한 세상의 언어로 탁월하게 표현한 것이다 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탁월한 리더십이라는 측면에서 18절 말씀은 더욱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8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지혜라는 것은 부지런함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리더십이라는 것을 정의할 때에 머리가 명석하고 번뜩이는 리더에 더 포커스를 맞추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의 리더십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뛰어난 머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타인을 배려하는가 얼마나 헌신적인가 그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부지런히 공동체를 살피는가 거기에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리더가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고 단지 손을 놓는 것만으로도 이미 공동체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리더십을 생각할 때에 그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그런 소극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리더가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면 이미 그러한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서 공동체가 무너지게 되다는 것을 경고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언어와 리더십에 대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 말씀입니다.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그분의 열심을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아름답게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물의 정점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반역하였습니다. 사실상 인류의 역사는 거기에서 끝이 나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이 세상을 포기하시지 않았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분께 범죄하고 반역한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서, 비난과 폭력의 언어가 아니라 생명의 약속을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 말씀입니다. 마귀를 향한 심판에 대한 선포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에 대한 선포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은혜와 구원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늘 전도서의 말씀은 진정한 리더가 보여주어야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은혜로운 말을 하고 자신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고 섬기는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서 기꺼이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열심으로 약속하신 예수님을 보내기 위한 모든 일을 역사 가운데 친히 이끌어오신 것입니다.
메시아를 예언한 이사야 9장 6절과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은혜의 약속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그분의 지혜와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며 가장 고상한 분이시며 가장 성숙한 분이시며, 자신의 생명을 죄인을 위하여 기꺼이 사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죄인을 살리시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는 참된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있는 예수님이 세우신 공동체인 교회는 어떤 곳인가? 가장 높으신 예수님이 가장 낮아지셔서 섬기신 것처럼, 세상적으로 가장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장 낮은자리로 들어가서 기꺼이 섬기는 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라고 교회를 격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 과연 무엇이 주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리석고 상처를 주는 악한 말을 하는 곳이 아니라 부지런히 사람을 살리며 격려하며 생명을 주는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나누는 것이 바로 주의 일인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더욱 성숙한 사람이 되어서 특별히 공동체의 리더들이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며 공동체를 위하여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헤브론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따뜻하고 격려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가 넘치고, 어려운 이들의 필요를 살피고 돌보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가서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평생을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추구해 나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선물로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무례하고 교만하고 악한 말이 아니라 따뜻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저의 입술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열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주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 삼아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신 것처럼 공동체 안에서 희생과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에게 맡겨진 것들을 삶의 우선 순위에 놓고 성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으로 저를 변화시켜주시옵소서, 저를 통해서 공동체가 더욱 회복되고 풍성해지도록 저의 삶을 사용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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