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섬기는 교회를 통하여 김형국 목사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비록
몇번의 강의 밖에 듣지 못했지만 정말 귀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자로서 또 목회자로서
매우 탁월하시고, 설명하고 삶으로 보이시는 방향이 매우 성경적이라고 이해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어느 자리와 상관 없이 열정을 보이시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이번에 저희
교회의 목회자 수련회를 하면서 함께 목회자들이 김형국 목사님의 강의를 듣고 나누기로 하였습니다. 이미
김목사님의 탁월한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마음을 쏟아서 정리해보고 싶었고, 또 저의
목회 가운데 어떤 부분을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내용을 반추해 보았습니다.
위에 링크로
걸어드린 김목사님의 탁월한 강의를 직접 들으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서 배우시면 좋겠습니다. 아래
내용은 강의의 요약을 주로 담고 있지만, 몇가지 자료들을 인용해서 김목사님의 설명에 충분히
동의하기도 하고 김목사님과 생각을 약간 달리 하는 부분도 포함해서 제 자신을 위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1. 왜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목양의 삶을 살아야 합니까?(요21:15)
요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 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5, 17: βόσκω; 16:ποιμαίνω)
개신교는
지금까지 사제주의와 샤머니즘의 혼합이었다. 목양의 이유는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 다시 벧전 5:2에 다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양 무리를 치는 자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말씀의 컨텍스트가 모든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목양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미 모범을 보여주신 것인데,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목양은 “목양 받는 자가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목자가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양은 자신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목양의 본질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떠나면 보혜사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목양은 “성령님이 하시는 것을 조력하는 것”이다.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목양은 다양한 테크닉을 사용할 수 있지만 뛰어넘는 것이다. 이것을 놓치면 목양의 길을 잃게 된다.
2. 무엇을 가지고 목양할 수 있습니까?(마9:35)
마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24:14) (이하 개역개정) 9:35 Then Jesus went
throughout all the towns61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each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kind of disease and
sickness. (이하 NET)
그렇다면
양 무리를 무엇으로 먹일 것인가? 예수님의 본을 보고 그대로 하면 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먹여야 하는 내용이다. 목양의
실패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니라 다른 것을 먹이기 때문이다. 목양의 퀄리티는 어떤 신학으로
무엇을 먹일 것인가 여기에서 결정된다. 1차 자료는 “천국
복음”이다. 나머지는 2차 자료(ex) MBTI)에 불과한 것이다.
3. 하나님 나라 복음과 십자가 복음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강조되지 않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만을 강조하는 십자가 복음은 문제가 있다.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목양의 목적은 잘 보전해서 죽으면 천국 가도록 관리해
주는 것이 목양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고 이미 오는 세대가 시작 되었다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깨어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살아낼 수 있게 도울 것인가 & 어떻게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도와줄 것인가 & 세상에서 망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회복되는 과정을 돕는 일” 이것이 목양이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알려주고, 교리로나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주일에 잘 나오는 사람으로만 붙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다양한
목양의 내용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우산 아래로 통합이 되어야 하고
그 때에 힘이 생기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4. 목양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마5:48, 고전4:19, 골1:28)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8 So then, be
perfec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갈라디아서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 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4:19 My
children—I am again undergoing birth pains until Christ
is formed in you!
골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1:28 We
proclaim him by instructing and teaching all people with all wisdom so that we
may present every person mature in Christ.
목양의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각
사람이 온전해져야 한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성도들을 수고로 낳았고 그들이 회심하게 했지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수고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였다.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 라는 말씀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재해석” 한 것이다. 골1:28 역시 같은 맥락으로 다시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는, 윤리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된 자, 하늘 아버지를 닮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가진 목양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NET BIBLE의 번역이 적절하다고 판단함)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15 but, like the
Holy One who called you, become holy yourselves in all of your conduct,
벧전 1:15에서 행실이라는 부분은 좁혀서 생각하지 말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 역시 “마 5:48의 말씀을 베드로 사도가 재해석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룩의
핵심은 온전성이다.
온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온전함을 알아가야 한다. 목양의
궁극적인 목적을 아는 목양자들이 성장하는 것이다. 본인이 예수님을 닮아가지 않고서는 목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다는 것이다. 목양은 기술, 사람의
조작, 위로가 아니다. 목양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것”이며 목양자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만” 한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1:1 Be imitators of
me, just as I also am of Christ.
그러므로
고전11:1에서 본받는다 (미미테스)는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단어였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본받으면 그리스도를 본받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진정한 목양자는
내가 온전해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Imitating Our Teachers. Ambrosiaster (ad
366-384): It is normal that we should imitate those whom God has set over us as
teachers. For if they imitate God, why should we not imitate them? For just as
God the Father sent Christ as the teacher and author of life, so Christ sent
the apostles to be our teachers, so that we should imitate them, for we are
unable to imitate him directly. Commentary on Paul’s Epistles. =>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교사들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본받기 때문임, 풀어서 설명하자면, 리더들이 하나님을 본 받는다면
마땅히 그들을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임
Gerald Lewis Bray, ed., 1–2 Corinthians, 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9), 103.
(The Martyrdom of S. Polycarp) For Him, being the Son of God, we
adore, but the martyrs as disciples and imitators of the Lord we cherish as they
deserve for their matchless affection towards their own King and Teacher. May
it be our lot also to be found partakers and fellow-disciples with them. => 순교자 폴리캅은 주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제자된 순교자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기를 소원하고 있음
Joseph Barber Lightfoot and J. R. Harmer, The
Apostolic Fathers (London: Macmillan and Co., 1891), 209.
그렇다면
어떤 영역에서 온전해 질 수 있는가? 제자 훈련의 개념을 여기서 생각해야 한다. 제자훈련은 모든 영역에서 균형 있게 성장하는 전체 개론 혹은 오리엔테이션이다. 이 내용을 그렇게 살아가고 생명을 누리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양이다. 제자훈련
이후에는 목양으로 반드시 지속적으로 끌고 가야 한다. 그러므로 제자 훈련과 목양은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균형 있는 성장의 네 가지 관계의 회복 (하나님, 자신, 세상, 공동체)을
목표로 해야 한다. 양육자가 이 성장을 먼저 경험하고, 이
나타나는 것의 진리와 경험을 기반으로 성도를 격려하고 가르치고 꾸짖고 이렇게 하는 모든 활동이 목양이다. 그러므로
이끔이와 따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끔이와 따름이의 장엄한 대열”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5. 어떻게 목양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마28:18-20)
마 28:18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 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
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양떼를
먹이라” 라는 것은 “제자를 삼으라” 라는 것과 동일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가야” 하는데,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신 것처럼 반드시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며 그것이 출발점이 된다. 세례를 주는 것은 회심인데, 회심이 없으면 목양이
되지 않는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목양이 아니라 전도 사역을 해야 한다.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 목양이다. 지키게 하는
것이 율법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가르쳐서 살아내게 하라 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의 영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목양의
내용은, 천국 복음이다. 목양자가 기댈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내용 즉 진리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며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기 때문이다(요 6:35). 여기서 떡이라는 것은 “일용할
양식”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생명의 밥이며 성도의 주식이 되신다라는 의미이다.
When we eat bread for the nourishment of the
body, we see more clearly not only our own weakness, but also the power of
divine grace, than if, without bread, God were to impart a secret
power to nourish the body itself. Thus, the analogy which is traced between the
body and the soul, enables us to perceive more clearly the grace of Christ. For
when we learn that Christ is the bread by which our souls must
be fed, this penetrates more deeply into our hearts than if Christ simply said
that he is our life. => 칼빈 역시
빵이라는 것의 물질적인 것 혹은 일상적인 것을 염두에 두면서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빵이 되신다는 것의 의미를 이끌어내고 있음
John Calvin and William Pringle,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Bellingham, WA: Logos Bible
Software, 2010), 249.
생명의
밥의 메타포는, 진리가 자유케 하는 것이며, 성령을
통해 생수의 강이 넘치게 되는 것 이 모든 것은 동일한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알아가고 누리고 우리가 자유해지고 성령이 충만해져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 그것이 목양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목양의 주체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목양자는
목양의 조력자일 뿐이다. 목양자의 능력이 아니라 목양에 있어서 성령님의 인도를 분별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중보 기도가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성령님과의 기도는 목양 전체에 흘러가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목양의 형태는 어떠한가? 3가지이다. 1. 목양
사역자 중에 한 사람으로서의 목회자(목양팀), 2. 목회자
자신이 유일한 목양자(작은 규모의 교회), 3. 마지막으로
목양 사역팀의 리더로서의 목회자이다(규모가 있는 교회).
세가지가
장단점이 다 있고 장점을 살려야 한다. 1의 경우는 어려움이 생길 경우에 함께 지혜를 나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주로 관리 차원에서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아쉬움이 있다. 심지어 목양 사역자들을 경쟁을 시킬 경우에는 교회가 무너진다. 그러므로
목양자는 팀을 이루고 동역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2의 경우는 외롭고 지칠 수 있다. 그러나
누구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목양의 본질을 가지고 씨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것을
놓치면 안된다. 이것을 놓치고 3의 단계가
되면 관리만 하는 목회자가 된다. 목양의 사이즈가 작을 때에 자기의 양무리를 잘 먹이면 목양의
역량이 늘어나는 것이다.
3의 경우에는 목양을 아는 사람이 팀장이 되면 목양 팀의 시너지가 일어난다. 반면에 목양의 현장에서 멀어지면 목양의 감이 떨어지며, 다른
목양자들을 서포트하기가 어렵고 통계에만 집착하게 된다.
하나복
목양의 지향점은, “목양자를 키워내는 목양”이다. 다시
말해 성도를 목양자로 키워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목사들과 함께 함께 동역하고
목양하는 사람들을 키워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세가지 형태는 다 존재할 수 있는데, “어떻게 목양자를 세울 것인가”라는 것에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엡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개역개정) 11 And
he himself gave some as apostles, some as prophets, some as evangelists, and
some as pastors and teachers, (NET)
11 Furthermore, he
gave some people as emissaries, some as prophets, some as proclaimers
of the Good News, and some as shepherds and teachers. =>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은 pastors로
번역, CJB만 shpherds로 번역, 그렇다면 굳이 목자라고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냥
성경이 요구하시는대로 목사와 교사의 역할을 서로 존중하는 것이 낫지 않는가?
David H. Stern, Complete
Jewish Bible: An English Version of the Tanakh (Old Testament) and B’rit Hadashah (New Testament),
1st ed. (Clarksville, MD: Jewish New Testament Publications, 1998), 엡 4:11.
Sn (study note) Some
interpreters have understood the phrase pastors and teachers to
refer to one and the same group. This would mean that all pastors are teachers
and that all teachers are pastors. This position is often taken because it is
recognized that both nouns (i.e., pastors and teachers)
are governed by one article in Greek. But because the nouns are plural, it is
extremely unlikely that they refer to the same group, but only that the author
is linking them closely together. It is better to regard the pastors as a
subset of teachers. In other words, all pastors are teachers, but not all
teachers are pastors. See ExSyn 284.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여기서
목사는, “목자”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성도
가운데 목자이면서 교사인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목사와 비슷하다. 성도들 가운데 성장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 사람들이
성도를 온전케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것이다.
목사가
모든 목양을 하는 사제주의에서 벗어나서,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 되어서 다른 성도를 이끄는 교회”가
되어야 한국 교회가 회복되는 것이다. 오랜 목회를 해서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를 보살필 줄 아는 목양자를 세우는 목양”, 이것이
목양의 형태를 넘어선 “하나복 목양이 지양하는 바”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을 세우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세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함께 팀”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면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이다. 그런 면에서 목양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옆에서 하나님 하시는 일을 돕고 하다 보면 결국 사람들이 변하며 성령님께서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동시에
목양은 힘든 것이다. 최고의 목양자이신 예수님이 목숨을 바치신 것처럼 예수님을 따라가는 목양자는
자신의 살과 뼈를 깎아가면서 목양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광이 있지만 큰 댓가가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양의 성패”가 교회의 성패를 좌우한다. 어떤
목양자가 있는가가 그 교회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리자가 아니라 목양 전문가가 필요하다.
6.누가 목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고전11:1)
고전 11:1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7. 헤브론 교회에서 목양사역팀은 누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수준은 어떻습니까?
목양 사역팀은
기본적으로 순 담당 목회자, 순 담당 장로, 순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헤브론 교회는 관리 중심적인 구역에서 목양 중심적인 순으로 개편을
했기 때문에 목양 사역팀이 누구인가는 매우 선명합니다.
다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궁극적인 수준의 목양팀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목양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점에서 확고한
비전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 듯 합니다. 여전히 천국에 대한 개념을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림의 확장이라는 것보다는, 예배에 잘 참석해서 신앙을 관리하는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오랫동안 성경 지식의 습득 자체가 순 모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오리엔테이션 속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삶을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다스림을 추구해나가는 방식의 순 모임 진행을 여전히 어색하게 받아들입니다. 셋째로, 목양팀 안에서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합니다. 좀 더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목양을 위한 중요한 첫번째 단계인데, 목양팀 자체적인 모임을 좀 더 밀도 있게 만들어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넷째로, 목양팀 안에서 목양 리더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데 아쉬움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변화를 통해서 앞서나가고 그리고 목양 받는 사람들이 따라와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성경 지식을 전달함으로써 목양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8. Reflection
성경과 목회를
깊이 있게 연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김형국 목사님은 목양의 근본 원리와 목적을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조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시고 행하시고 명령하신 목양을 분명하고 탁월하게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목양이 사도들의 목양의 목표이자 명령이었다는 것을 매우
설득적으로 제시하였다.
김형국 목사님은
현재 교회 목양의 실패 혹은 어려운 상황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다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단순히 개념적인 접근 뿐 아니라 실상 목양을 받는
사람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기초로 해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단지 기초적인
강좌를 들었을 뿐이기에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결국에는 후반부에 How to 의 문제를 풀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형국
목사님의 교제를 가지고 강의식으로 하든, 혹은 토론식으로 하든, 혹은 북클럽으로 하든,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목회를
배우고 실천하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실제로 삶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당장
힘들어 하는 성도를 앞에 놓고 과연 목회자는 어디에서 무엇을 시작해야 할 것인가?
대부분의 내용에
거의 동의하지만,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구분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은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다면, 사실상
하나님 나라의 구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결국 궁극적으로 사랑으로 움직이게 된다. 단순히 당신이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왔다라고 논리적으로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면에서
리폼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복음은 내가 행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
틀림없다. 복음의 반복적인 선포가 늘 필요하다. 약간
의아했던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전이라는 짧은 책 속에서 김형국 목사님은 인간의 행위를 마치
믿음 안에 넣어야 하는 것처럼 믿음을 설명한다. 나는 이러한 설명 안에서,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 나라 복음 사이의 긴장 혹은 약간의 혼란을 경험한다.
김형국 목사님
본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순장을 파송하는 데 있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지점에서 순장들은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현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지적으로 익힌 사람”이 아니라 “현
시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강권적인 다스림으로 경험하는 사람이” 진정한 목양자가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나눌 것이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 십자가 복음 안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포함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목회는 매우
복합적이다. 만약, 하나복의 내용만 잘
숙지했다고, 그리고 그 교제를 도입한다고 성경적인 목양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김형국 목사님은 강의 중에 여러
목회의 기술들 (Ex) 상담)을 언급하며, 그것들이 필요하지만 그 모든 것을 품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히려, 김형국 목사님은 이미 본인이
언급한 모든 목회적인 도구들에 이미 탁월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나복이라는 큰 성경적인 목양의
우산 안에 통합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탁월한 강의를 듣고서 마음이 무겁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령님이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충분히 안심할 수 있다. 결국 목양은 김형국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형국 목사님 역시 자신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속한 자리에서, 목양의 궁극적인 방향을 성경적인 내용을 붙들고 고민하고 씨름하면서 할 수 있는 부분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