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영화관을 거의 가지 못했습니다.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영어 자막도 없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딱 다섯번 영화관에 갔군요, 애니메이션 Car를 1불 주고 보는 영화관이 있었습니다. Pacific Rim을 보았고, Top Gun: Maverick을 두번 보았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영화가 Beyond Utopia 입니다.
사실 이 영화가 상영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더상상 미디어의 유정임 선생님의 소개로 알게 되었습니다. 미디어의 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참 귀한 분입니다. 그런데 고민이 되었습니다. 너무 빠듯한 스케쥴 안에서 영화를 봐야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근처 영화관에서 상영을 하여 부리나게 달려갔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서 진실하게 그 아픔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두가지의 이야기 갈래로 흘러갑니다. 하나는 한 가족이 북한을 탈출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탈출 과정 그대로를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떻게든 아들을 그곳에서 탈출 시키려는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들은 북한을 탈출하는 분들이지만, 또 한명의 주인공은 갈렙 선교회를 섬기는 김성은 목사님입니다. 영화 처음부터 이분이 전화 통화를 하는 장면이 여러번 나옵니다. 처음에 저는 도대체 이분이 왜 중심에 있는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분이야 말로, 탈북하려는 분들에게 거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탈북의 과정은 대략 이러합니다. 제가 이분의 귀한 사역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영화 한편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은 목사님의 사역은 결정적입니다. 김성은 목사님과 연결이 되어 있는 국경 근처 브로커를 통해서 탈북이 시작 됩니다. 그럼 그 브로커들의 안내를 따라 여러 나라를 거쳐서 이동합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는 직접 김성은 목사님과 조력자들이 그들을 만나서 데리고 다시 이동합니다.
영화의 압권은, 정글을 지나는 장면입니다. 탈북민들을 데리고 브로커의 안내를 따라 직접 김성은 목사님이 함께 정글을 헤쳐나갑니다. 길이 포장 도로가 아닙니다,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서 우거진 나무들을 헤치고 나가야 합니다.
원래 열시간 정도를 가야하는데 돈을 더 요구하는 브로커 때문에 시간이 훨씬 길어졌습니다. 어린 아이와 할머니까지 함께 하니 이건 정말 보통 어려움이 아닙니다. 영화는 퉁퉁 부어버린 김성은 목사님의 발목과 완전히 탈진해버린 그의 얼굴을 비춥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저 분은 저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어떤 자유도 없는 철저한 억압의 나라 북한에 대한 설명과 영상들도 간간히 등장합니다. 영화는 김성은 목사님이 직접 이끌고 나온 한 가정의 행복해진 모습과, 결국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지 못해서 사진 한장만 놓고 오열하는 또 다른 어머니의 모습을 대조하며 마무리를 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는데, 제가 걸어가는 그 길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제 발이 땅을 디디고는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습니다. 개인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는, 미국 도시의 그 한적한 길이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이 자유를 이렇게 당연하듯이 호흡하고 있는데, 이 지구상의 누군가는 그 어떤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제가 누리는 이 자유가 그분들에게 너무나 죄송스럽고, 또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위해 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여러 각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영화 자체로 보면 편집과 사운드의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아마 제작비의 한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자로서 영화 속에 깊이 들어가서 목회자의 관점으로 영화를 보았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이후로 쉴새 없이 달려 왔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깊은 한켠에, 과연 목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목회가 무엇인가? 물론 교과서적인 답들은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목사로 부르심 받고 목회자의 삶을 살아갈 때에, 나의 인생 전부를 걸수 있는 그 어떤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요즘에 제 마음에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서 더 크게 느끼는 것은, 목회는 "곁에 있는 것" 임을 깨닫습니다. 목회는 사실상 누군가의 곁에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물론 설교도 행정도 교육도 심방도 필요하지만, 그 본질 안에 깊이 들어간다면 결국 목회는 곁에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곁에 있고자 하는 그 영혼의 진실함이 없다면, 저의 모든 것이 위선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섬기는 크리스천 북클럽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클럽은 "경청의 시간"입니다. 경청은, 그 사람의 존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답이 있어도, 그 사람 곁에서 더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북클럽을 해보신 분들의 공통적인 소감입니다. "함께 하시는 분들이 저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 말의 다른 표현은 이것입니다, "당신이 제 곁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목회는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나의 가전 것을 누군가의 곁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육신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신학적으로 성육신이 가장 위대한 것임을 지적으로는 알았지만, 그러나 오랫동안 여전히 마음으로 깊이 공감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조금 더 마음이 변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에게 오셔서 바로 곁에서 기꺼이 함께하셨던 것처럼, 목사는 성도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참 마음이 무겁고 슬펐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에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바라던 목회의 본질을 하나님께서 저에게 깨닫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분들이 목회자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를 필요로 하는 분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입니다. 외롭고 마음이 낙심한 분들입니다. 고난은, 성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신비한 일하심을 열어주는 문과 같습니다. 깊은 외로움은, 진실한 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목회는, 바로 그 자리에 그분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는, 제 개인의 기쁨과 유익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온전히 상대방을 위한 것입니다. 이제보니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저의 발걸음이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이 온전히 연약한 자에게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더욱 명백해졌기에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북한을 위해서 힘써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제 삶의 분명한 방향을 정하였습니다. 성도와 함께 하는 목사, 그 곁에 있는 사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평생을 신실하게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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