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 일요일

내 영혼에, 상쾌한 빛이 들어오다 - 순전한 기독교의 짧은 부분들에 대한 작은 생각들

 


저는 어렸을 때 부터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훌륭한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물론 훌륭한 사람을 보면서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훌륭한 사람이 만들어지는 그 방법을 알 수 있다면, 저도 꼭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철이 들면서 그리고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결국 훌륭함은 모방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즉, 탁월함을 모방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소화하는 것이, 훌륭함에 대한 첩경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팀캘러 목사님도 좋아합니다. 팀캘러 목사님은 '21세기의 C. S. 루이스'라고 불리웠습니다. 루이스를 읽고 팀캘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제가 깜짝 놀란 것은, 그분의 설교 곳곳에 결정적인 부분에서 루이스의 논리와 그의 생각과 글들이 묻어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팀캘러 목사님의 훌륭함은, 루이스로 부터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왜 루이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신다면, '단 두문장만 읽어도 저의 영혼에 상쾌한 빛이 비추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책이 많이 있습니다. 저 역시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아쉽게도 그 중에 대부분은 지루했습니다. 무엇인가 힘주어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정작 마치 미로를 헤매이는 것처럼 저를 제대로 인도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에게 루이스는, 아주 짧은 몇 구절만 읽어도 저의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의 책을 읽으면, 심지어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루이스는 다정한 사람입니다. 그의 글과 그의 신앙은 마치 저에게 상쾌한 가을 바람과 같아서, 저의 영혼을 전혀 다른 그 어떤 곳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와 함께 거닐다 보니,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전학과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 교수로 섬겼습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5세 때에 무신론자가 됩니다. 그러나 신앙 서적과 친구의 영향으로 다시 서서히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31세가 되어, 지적으로 정직한 자세를 가진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고 진정으로 회심하게 됩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제2차 세계대전 시절 평신도와 무신론자들을 위한 라디오 방송에서 그가 발표했던 것을 책으로 엮어낸 것입니다. 루이스 평신도로서 교파를 초월해서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것을 다루고, 그러한 믿음의 내용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충실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이십대 초반에 순전한 기독교를 처음 읽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참 좋았지만 역시나 루이스의 글을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루이스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내면 안에 새로운 깊이를 만들어 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담임 목사님의 안식년 동안 잠시 주일 강단을 섬기면서, 저의 부족한 부분을 절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앞으로 저의 삶을 다져나갈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루이스를 아주 천천히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쉽게도 이 시대는 속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로 접근하고 싶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다시 새롭게, 기독교 신앙의 탁월한 내용을 저의 영혼 안에 새겨 넣고 싶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전체적으로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이라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반드시 전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렇게 발견한 절대 선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될 때에야 결국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그렇게 하나님을 믿게 된 이들이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위 일체 하나님의 개념을 바탕으로 참된 성도됨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새 사람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저의 짧은 글 쓰기로는 이 책의 깊이와 감동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는 것이야 말로 신앙 생활의 원동력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모태신앙으로 자라서 수도 없이 복음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진리를 아는 것과, 이것의 깊이와 충격을 온전히 이해하고 내 삶에 근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런면에서, 루이스 그리고 순전한 기독교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루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사실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며 동시에 너무나 신선하고 감동적으로 전해주기 때문에 그가 탁월한 신앙인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자연법에 대한 것은, 기독교를 이해하고 변증하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절대적인 진리 혹은 법칙을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행동해야 한다는 본능을 내면에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증명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명확하게 그것을 어기고 있임을 지적하며 인류 전체를 몰아갑니다. 

물론 위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평범하게는 이렇게 접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죄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도로 논리를 풀어가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관찰에 기반하여 우주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합리성을 존중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들에 대해서 설득적으로 논증하고 있고, 바로 이런 부분이 루이스의 탁월함입니다.

최근에 순전한 기독교 천천히 읽기를 반년 만에 끝냈습니다. 다시 책을 열어보니, 책의 거의 대부분이 줄과 메모들로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편의 글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제가 설교에 인용했던 몇가지 구절 정도, 그리고 저에게 영감을 주었던 몇 부분들을 인용하고 저의 짧은 생각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회개할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잘 짚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를 포함한 우리는, 나의 죄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의 척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치와 소중함은, 그저 내가 처음에 기독교의 문 안에 발을 들여 놓을 때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것의 깊이를 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첫 순간에 회개를 하고, 그리고 평생 회개를 합니다. 우리는 회개할 수록 용서를 받고, 회개하면서 그리스도를 알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회개와 기독교를 완전히 결합하여 성경적으로 드러내는 루이스가 참 좋았습니다. 

또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이 우리 옛 조상들의 머리속에 불어넣어 준 생각은 그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마치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기라도 한 양 자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상관 없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낸 부분입니다. 죄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어떤 도덕적인 잘못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혹은 내가 나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넘어서서, 나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 방향, 내용 등을 철저하게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로 또 목회자로서, 이렇게 무섭고 또 무거운 죄에 대한 개념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왜냐하면 이러한 루이스의 죄에 대한 설명 혹은 논리는 우리의 성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화는 단순히 예배를 열심히 드리거나, 혹은 성경을 열심히 읽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대적하는 맥락에서의 나는 없고 오직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삶의 전 존재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이시며 왕이신 그 지위를 온전히 회복하시고, 나는 호흡 한번 조차 오직 그분께 모든 것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우리의 구원에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며, 우리는 그분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자들로 그리고 오직 그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목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저는 루이스를 좋아합니다.

루이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적들의 점령 지역, 이것이 현재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기독교는 합법적인 왕이 이를테면 변장을 한 채 어떻게 이 지역에 상륙했는가에 관한 이야기로서, 우리 또한 이 거대한 파괴 작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합니다. 교회에 가면 동지들의 비밀 무전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들이 우리를 교회에 못 나가게 하려고 그토록 노심초사하는 것입니다. 적은 이 일을 위해 우리의 자만과 게으름과 지적 허영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에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마치 교회가 사교 모임인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종종 계셨습니다. 현대화 되어 버린 교회에 출석하다 보면, 교회의 정체성이 매우 희미해 지는 듯 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매일 교회에 나오는 목회자인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루이스의 글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에 대한 상상력이 가득한 그리고 가슴 벅찬 묘사를 만납니다. 우리는 일종의 비밀 결사대와 같습니다. 우리는 변장한 왕을 모시고 있고 그분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비밀 무전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우리의 미래를 가늠하면서 그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평범한 설명을 싫어합니다. 그저 무감각하게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많이 상합니다. 그러나 루이스의 설명 속에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합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교회 생활 이라는 것이 이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는 진실한 신앙의 동료이며 저의 친구입니다. 그를 통해 교회에 대한 참된 영적인 감각과 기쁨이 제 안에 살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를 좋아합니다.

루이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대상-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또한 그가 기도하도록 밀어주고 있는 주체-원동력-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사람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 내지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 평범한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평범한 작은 침실 안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중적인 생명 전체가 실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좀더 높은 종류의 생명-제 표현대로라면 조에, 또는 영적인 생명-속으로 들어 올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안에 이끌려 들어가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기도에 대한 루이스의 이 설명을 읽을 때 마다, 마음에 전율합니다. 물론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라는 아주 단순한 표현도 진리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다릅니다. 저는 다른 그 어떤 기도에 대한 설명보다 루이스의 설명을 제일 좋아합니다.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기도의 목표, 기도의 원동력, 그리고 기도의 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보다 더 탁월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연약한 우리들이, 우리의 거칠고 아픈 손을 모아 주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충격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고 또 얼마나 아름답게 영원에 맞닿아 있는 것인지를 그는 보여줍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하늘을 활짝 열어 젖히고 그 비밀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루이스를 읽을 때 마다 이런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를 좋아합니다.

루이스는 그의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새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으면 결국 미움과 외로움과 절망과 분노와 파멸과 쇠퇴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루이스는 불신자들에게, 그리고 어쩌면 신앙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신앙의 논리나 멋들어진 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지금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실재적인 운명입니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의 책을 그저 논리로 읽지 않습니다. 이 모든 내용이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저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루이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저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찾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의 모든 것이 되는 그 궁극적인 상태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저를 결단하게 만들고 바로 잡아 주기 때문에 저는 루이스를 참 좋아합니다. 

글을 맺어야겠습니다. 지금 저의 기분은, 마치 보석이 가득 담긴 보물 상자를 품에 안고서는, 작은 손에 그 보물 중에 몇개를 잡고서 꺼내 자랑하고 있는 어린아이 같습니다. 너무 반짝이고 행복한데, 이 보물을 다 설명할 재주가 저에게 없어서 한 없이 아쉬울 뿐입니다. 

루이스를 읽은 저의 벅찬 마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짧은 글을 통해서 루이스를 잠시 접하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이 글을 읽으신 누군가와, 선선하고 아름다운 날에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루이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저의 인생에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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