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31일 수요일

십계명, 내 영혼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


디민(Doctor of Ministry) 과정이 즐거운 것은, 모든 수업과 과제가 목회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공부가 당연히 목회와 관계가 있지만, 디민 과정은 아주 명시적으로 목회라는 큰 목표를 붙들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목회적인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저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언제나 과제를 하면서 주의하는 것은, 과제를 위한 과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점수는 중요합니다. 교수님의 마음에 들만한 글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그 과제를 통해서 제 자신을 성찰하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십계명 과제는 저에게 많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행정학과 출신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겠지만, 저는 다분히 이성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분석하고 계획하고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는 것이, 마치 절대적인 명제처럼 제 인생에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효율적인것 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내면에는, 저의 이성과 그 논리적인 힘을 굉장히 신뢰하고 의지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나와,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많은 어려움들과 상황들을 만나면서, 저의 무력함을 철저하게 맛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인생이 마치 제 손에 달린 것 처럼 당당하게 살던 그 어이없던 모습이, 드디어 제 스스로에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내면을 심각하게 살펴보면서, 제 내면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제가 확신했던 만큼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각자 조금씩 다른 신학적 관점을 가진, 탁월한 저자들의 십계명에 관한 해설을 읽었습니다. 과제는 그것을 읽고, 요약하고, 평가하고, 그리고 목회적인 적용점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너무 행복했습니다. 특별히 데칼로그는, 제 인생에, 신앙인으로서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해준, 너무나 탁월한 책이었습니다.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절대자이자 아버지이신 그분을 향한 믿음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독서가 행복한 이유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배우는 것이고, 알아가는 것이고, 그래서 언제나 행복하고 희망이 있습니다.

3년 동안 영어로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배여 있었던 한글을 쓰는 법이 많이 흐트러졌습니다. 영어로 된 책들만 거의 보면서, 지금 생각하면 많이 우스운 사대주의에도 조금 빠졌던 것 같습니다. 물론 외국의 석학들은 탁월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한국인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가지는 그 독특함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한국어 디민 과정으로, 한글로 된 책을 읽고, 한글로 과제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이 세 권의 책을 읽고 정리하고 고민한 내용들을 함께 나눕니다. 물론 가급적이면, 책들을 직접 읽고 저자들과 함께 고민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1. 1계명: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1) 강영안: 우상은 단순히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다. 우상은 자연이나 힘이나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이 될 수 있다. 우상은 근본적으로 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상으로 표현된 그 배후에 자리 잡은 힘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신뢰하며 믿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우상이고 신이 된다. 하나님을 믿고 맡기지 않고 내 생각이나 재산에 맡기는 것이 우상 숭배이다. 실제적으로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인간이 그런 신을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솔로몬이 그러한 것처럼 우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 존재이다. 특별히 이 시대에 있어서 돈이 우상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돈을 일컬어 인격화하여 표현함으로써 그 위험성을 알려주셨다. 사람은 섬기는 것의 성질을 닮게 된다. 돈을 섬기면 돈의 성질을 닮는다.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고, 우리의 가치가 하나님의 가치만큼 되는 것이다. 하나님 이 외의 모든 것을 상대화함으로써 수단적 가치를 가져야 하고, 그 때에야 그 가치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2) 스탠리 하우어워스: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그 계명들을 이스라엘이 지킬수록, 그것으로 인해 욕망에 질서가 잡히고 참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존심이 강하시며, 질투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자신의 주권과 영광을 모욕하는 어떤 행위에 하나님이 감정을 격렬하게 나타내신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격렬하게 되기 십상인데 그분은 많은 위험을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랑과 분노라는 양극단을 다루시는 분이시며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전능하신 주권자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은 과분하다 싶을 정도로, 몸소 온전하게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철저히 개입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신약에서 하나님이 성육신을 통해 철저히 개입하실 것의 분명한 예시였다. 제1계명의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 얻어 낼 생각을 그만 하고, 대신 우리의 삶을 하나님 쪽으로 전향 시킬 것을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려는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란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다른 대상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정이다. 우리가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해 자율, 자립,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것은 현대성의 특징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되신 하나님을 신실하게 예배할 수 있도록 그분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예배하는 것이 곧 본향이라고 말씀하신다.

3) 김용규: 데칼로그 1편의 주제는, 과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의 대립구조로 짜여 있다. 서양 지성사에서 이성과 신앙의 본격적 대립은 A. D. 2세기 말엽 북부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가 만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 둘이 대립하고 또 혼합되면서 중세문명이라는 새로운 서양문명이 탄생하였다. 고대가 끝날 무렵 그리스 철학은 쇠퇴하고 사람들은 이성의 힘이 더 이상 새로운 삶의 의미를 만들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철학자들은 회의주의 혹은 신비주의를 기존 철학에 혼합했고 그 대표적 예 가 신플라톤주의이다. 그리고 초이성적 계시로 시작된 기독교는, 이성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는데, 이것을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 구하게 되었다. 즉 계시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들을 연구하고 있던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철학적 이론들에 관한 종교적 신조를 준비하던 기독교 계시가 연결되었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이성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계시를 설명할 수 있는 사변적 이론들을 신플라톤주의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이 사변을 통해 세계와 삶을 파악할 때, 기독교인들은 신앙으로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철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었는데, 이 난제에 대해 답변을 제시한 사람이 어거스틴이다. 그가 한 일은 '이성을 인정하되 신앙 아래 무릎을 꿇게 한 것' 이었다. 그는 '신앙은 지식의 출발점이다' 라고 말했는데, 한마디로 믿어야 안다는 것이다.
중세가 지나 근대가 시작되면서 이성 대신에 수학과 자연과학이 신앙의 대결자로 등장하였다. 합리적 인간이 대두하면서, 인간들은 신의 말씀보다는 수학적으로 계산되는 것에 삶의 기초의 확실성을 찾기 시작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추구했는데,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명제를 얻었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러나 이 사유 즉, 자신의 존재로부터 신의 존재를 연역해내는 사유는 확실성이 신에게 있지 않고 인간에게 근거하게 된 중요한 신호였다. 즉 신 중심주의 대신에 튼튼한 인간 중심주의를 확보한 것이다. 이것은 곧 이성의 승리였다. 결국 인간은 근대를 거치면서 신보다는 이성, 신앙보다는 과학에서 더 많은 확실성을 찾았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확실한 반석의 연원이다. 자연과학을 비롯한 학문들을 앞으로 더 발달해 인간이 이성적으로 더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더욱 분명해질 것은, 이성의 완전함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한계와 불완전함이다. 이성은 결코 신이 아니며, 그것의 산물인 지식 역시 실존의 불안을 떨쳐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신은 무한한 존재의 장을 펼쳐 그 안에 자신의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것이 야훼이다. 또한 신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통해 세계를 만들었다. 즉 신은 절대적으로 독립된 존재이고, 신의 창조에서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떤 필요도 없었다. 또한 신은 인격적인데, 모든 존재물들의 생성, 소멸, 그리고 그 존재의 현실에 '이미 그리고 언제나' 참여하고 있다. 구약과 신약 성서는 이러한 신의 참여와 작용에 대한 기록이며 약속이다. 또한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신은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유일신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을 다신론 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신이 존재인 한, 그 신이 유일자라는 것은 종교적 교설이 아니라 논리적 귀결이라는 점이다.
야훼가 질투하는 하나님인 이유는, 야훼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그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신은 그의 백성들이 신이 아닌 우상을 신으로 믿어 그것의 종이 되는 것에서 해방시키려고 제1계명을 내렸다. 우상이란 존재가 아니라 존재물에 불과하고, 어떤 열망의 형상화이기 때문에 이를 섬긴다는 것은 그 어떤 존재물이나 그에 대한 열망에 스스로 구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존재가 부여한 자유를 포기하고 다시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러한 노예 됨을 막고 존재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 제1계명을 주었고, 이것이 제1계명에 대한 존재론적인 해석이다.

4) 해석에 대한 평가: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계명들을 지킬수록, 그것으로 인해 욕망에 질서가 잡히고 참 자유를 얻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논리로 왜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김용규의 해석을 선호한다. 김용규는 모든 계명의 해석들을 통틀어서, 다른 두 저자들보다 훨씬 깊게 그 의미를 파고 들어간다. 계명들이 주어진 이유와, 그 계명을 마주한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그의 책을 통해서 존재와 존재물이라는 철학적이고도 아주 유용한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십계명의 해석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이 매우 놀랍다. 존재와 존재물이라는 주제는, 그의 책의 전체를 흐르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첫 계명에 관하여 김용규는, 우상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주 심도 있게 추적한다.
물론 결론적으로 보자면, 강영안 역시 동일한 우상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있지만, 김용규의 해석은 그 우상의 의미를 추적해 간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인간이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강하게 붙들고 있는 이성과 자연과학이 얼마나 강하게 우상의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들이 가진 허점에 대해서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특별히 데카르트가 얻은 가장 유명한 그의 명제로부터 신을 증명했다는 사실이, 사실은 신의 존재를 이해함에 있어서 인간에게 근거하게 된 것이라는 그의 설명은, 신앙을 배제한 이성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반대되는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결국 신앙인이 가져야할 최종적인 목표는, 어거스틴이 주장한 것처럼, 이성을 신앙 아래 굴복시키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5) 목회에 있어 적용점: 한국적인 맥락 안에서 십계명을 바탕으로 한 우상 숭배에 대한 설교들은, 불상과 같은 외형적으로 만들어진 우상을 섬기지 말 것을 요구하거나, 조상을 섬기는 제사와 같은 보이지 않는 우상을 섬기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강영안과 김용규의 탁월한 점은, 결국 우상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섬기는 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임을 지적한 점이다. 목회적으로 보았을 때에, 이러한 통찰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 통찰은 목회자가 성도를 지도함에 있어, 피상적인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으로부터, 인간의 삶의 본질을 꿰뚫는 실질적인 우상에 대한 경고로 전환할 수 있도록 전환점을 만들어 준다. 즉,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우리에게 두는 우상 숭배라는 것이, 일부의 성도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직면하고 있는, 성도로서의 삶의 핵심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이 부분이 더욱 깊게 파고 들어갈 때에,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절대적인 우상은, 인간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의 이성이며, 그런 면에서 이성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고 직설적으로 설명한 김용규의 논리의 탁월성이 드러난다. 인간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의 이성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핵심적 논리는, 목회적으로 보았을 때에 인간과 그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더욱 강하게 신뢰하고 의존하는, 계시 의존적인 태도를 교회 가운데 강하게 확립해야 한다는 목회적인 목표를 세우게 한다. 또한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이성을 굴복시키며, 마땅히 가져야할 인간의 겸손한 태도를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목표 또한 세우게 한다.



2. 2계명: 어떤 형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1) 강영안: 하나님의 신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 방식대로 섬기려는 것이다. 형상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섬기는 신을 상으로 만들면 그 신을 한 곳에 머무르도록 붙잡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깊은 의도는, 그 신을 내 마음대로 조작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작을 통해서, 인간의 안전을 확보하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삼는다. 하나님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서 섬긴다면,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어떤 형상도 하나님의 영광이나 위험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언약 관계이기 때문에 그분을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전달함에 있어 음성을 택하셨고, 그것이 말씀이 되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신다. 만약 우리가 우상을 만들면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데, 그것은 다른 의미로 자신의 권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받으셔야 할 존경을 마땅히 찾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끊임없이 만들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 주신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2) 스탠리 하우어워스: 저자의 기준으로 인해, 제 1 계명에 내용 포함

3) 김용규: 제 1 계명에 내용 포함

4) 해석에 대한 평가: 강영안의 해석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그가 형상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 방식대로 섬기고자 하는 것,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신조차 조작하고자 하는 타락한 인간의 속성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결국 타락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영안의 해석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또한 강영안의 해석의 탁월한 점은, 어떤 형상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그리고 교회를 다스리시는가에 대한 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원하셔서 선택하신 것이, 말씀을 통해서 통치하시는 것임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목회자로서 말씀에 그리고 설교에 얼마나 힘을 쏟아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교회 가운데 실현시키고자 목회자로서 노력할 때에,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결국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말씀이라는 방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영안의 해석을 통해 새롭게 배우게 되었다. 다만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언약 관계이기 때문에, 그분을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그의 해석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5) 목회에 있어 적용점: 2계명은 목회적으로 보았을 때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하는 마땅한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십계명 전체를 통해서 흐르는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은 절대자라는 것이다. 그분은 인간의 생각, 인간의 능력, 인간의 조정을 뛰어 넘는 분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감히 인간은, 피조물 혹은 상상 속의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은, 마땅히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로부터 섬김을 받으셔야 하는 존재이다. 때문에 인간에게는 언제나 두 가지의 선택이 있는데,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는 것처럼 착각할 것인가의 선택이다. 교회가 규모가 커지고, 목회자가 명성을 얻게 될 때에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신의 달라진 위상과 규모를 대단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리고 교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의 위치와 명성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절대자이시며 주권자이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자신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며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분을 섬기는 목회자 그리고 교회가 되어야 함을, 2계명을 통해서 확인한다.



3. 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1) 강영안: 성경에서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존재를 뜻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인지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무엇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 지배권을 갖는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 당신이 누구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서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의 야훼라는 이름을 알려주셨다. 지구상에 모든 인류는 자존하는 이가 아니라 타인의 산물이지만, 야훼 하나님만이 다른 아무 존재에 의존하지 않으시는 절대적인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으로 축복하고 그 이름을 찬양하고 그 이름에 의지할 수 있도록 하신다. 심지어 그분의 이름을 교회에 맡기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주술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고나, 욕설로 사용하거나, 혹은 거짓 맹세하는 것을 금하신다. 이 계명은 또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사용하라는 의미도 담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마땅히 존경 받고 마땅히 무게가 인정받도록 사용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

2) 스탠리 하우어워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신 백성이 되는 특권을 받았다.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상대방에게 진실을 말하기로 작정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상대방에게 진실을 말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짓 맹세를 하면 우리 이웃은, 하나님이 우리의 거짓말을 기뻐하신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마주한 베드로가 그들을 책망한 이유는, 그들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는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칼뱅은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맹세할 수 있다고 말하며, 그는 우리가 소박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애써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에는 더욱 그래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이야말로 설교의 신성함을 교회가 발견할 때이다.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솔직하게, 그리고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도록 교회와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3) 김용규: 신에게는 이름이 없고 또한 당연히 없어야 한다. 이름이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것, 곧 그것의 본질이 이미 규정되고 한정된 존재물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은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저' 존재한다. 출애굽기 3장 13절의 의미는, 고대 히브리 사람에게는 단순히 '나는 있는 자이다' 또는 '나는 존재이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 으로 있지 않고 '그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최고의 존재물' 이나, '가장 강한 존재물' 이 아니고, 단지 '존재' 임을 나타내는 신의 이름은 그 자신에 대해 이미 많은 설명과 이해를 던져 준다. 히브리어에서 Eheyeh 는 미완료적 의미이다. 즉 신의 존재는 존재물들과 다르게 완료된 것이 아니고 영원히 미완료 적이라는 뜻이다. 신의 이름이 없는 이유는 신의 본질이 우리가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는 존재물들의 본질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 본질이란 플로티노스의 '일자', 곧 무한정자, 무규정자, 포괄자로서의 '존재' 인 것이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존재'를 삼위일체 신 중 1위인 아버지, 곧 성부로서 이해했다.
망령되이 라는 뜻은 단순히 거짓 맹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데는 그에 합당한 목적과 사용법이 있으니 그에 합당하게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금지를 나타내는 부정문 형식의 명령문인 제2계명은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긍정문 형식의 권유 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즉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그에 합당하게 일컬어라'가 되어야 한다. 생명은 신에 속하고 신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생명 존중 사상이 근거한다. 데칼로그 2편에서, 비록 진료부장이 거짓 맹세를 했지만, 그러나 제2 계명을 긍정문 형식으로 이해한다면, 그의 거짓 맹세는 오히려 신의 이름에 합당한 것이 된다. 그것은 태어날 아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진료 부장은 신의 소유인 생명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거짓 증거를 했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 신의 이름에 합당하게 맹세한 것이 되었다. 칼뱅에 따르면, 율법은 여전히 외경과 순종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유의 의미에서이지 절망의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래서 2계명은 '신, 곧 존재에 합당하게 맹세하라. 그러면 너희도 자유롭게 될 것이다' 로 바뀐다.

4) 해석에 대한 평가: 하나님께서는 다른 아무 존재에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이름을 교회에 맡기시고 영광되게 사용하라고 주셨다라는 강영안의 해석은 탁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이름을 사용토록 하신 것은, 그분의 우리를 향한 낮아지심과 사랑의 역설이 들어 있다. 그분의 이름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교회는 그분의 이름을 소중하게 다루고 사용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알려주신 백성들의 교회 안에서, 거짓말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지적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그의 지적처럼, 성경 가운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명확하게 증거 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전반적으로는 김용규의 해석의 깊이를 선호한다. 존재라는 것에 기반을 둔 그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좋은 해석이다. 또한 그것이 기독교 역사 가운데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가를 잘 짚어주고 있다. 신에게 이름이 없어야 함을 보여주는 그의 논리가 놀랍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강한 존재물이 아니라, 스스로 설명하신 그대로 그저 있는 분임을,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가장 잘 표현하는 그분의 이름임을 김용규의 해석을 통해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한 김용규의 책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는, 부정적인 명령을 긍정적인 명령으로 바꾸고자 하는 해석이 매우 의미가 있어 보인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고자 하는 부정적인 분위기에서, 그의 이름을 그분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석해가는 과정은, 소극적인 크리스천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능동적인 크리스천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힘이 있다. 단순히 진실을 맹세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데 있어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고 맹세해야 한다는 매우 복잡하고도 섬세한 해석을 보게 된다.

5) 목회에 있어 적용점: 목회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에, 주님의 이름으로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을,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상대방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과 연결 지은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해석은 매우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더 나아가, 김용규의 관점, 즉 진실을 말할 뿐 아니라 그 진실을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말하라 라는 관점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 성도들의 삶 가운데 적용되어야 할, 하나의 중요한 명제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성도는 마땅히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이차적으로는 그 진실조차 하나님의 이름에, 다른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은, 한국의 맥락에서는, 진실하지 못한 목회자 혹은 교회에 대한 불신이 이미 깊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계명은,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에게 적용되어서, 목회자와 교회가 사회 가운데 진실하고 정직한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아마 이것이 한국 교회 가운데 가장 시급한 목회적 적용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서 더 나아가, 그 진실함조차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의 실제 삶 가운데에서는, 데칼로그에 등장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진실을 말하라는 명제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수많은 경우가 있다.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진실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깊은 삶 속에 적용은, 그리고 그 적용까지 이끌어가는 과정에 대한 설계는 결코 목회자가 대신하여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목회적인 관점에서, 성도에게 단순히 기준이 되는 명제를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명제를 적용함에 있어 성도들이 성숙한 사고를 전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목회자의 목회적인 방향과 그 프로그램 가운데, 성도들 스스로가, 복잡한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4.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1) 강영안: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를 원하신다. 즉 안식일을 다른 날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안식일은 출애굽 이후에 지켰다고 추정할 수 있고,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는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은 토요일 안식일도 지키고 안식 후 첫날 곧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켰다. 적어도 신약 성경에서는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증거를 찾을 수 없고, 교회가 결의를 해서 안식일 제도가 생긴 것은 538년 오를레앙 회의 때였다. 칼뱅의 의도는,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지켰던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에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안식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은 사실상 자유와 축제의 날이었는데, 탐심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안식일이 짐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었고, 안식일의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구속당하고 말았다.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사람을 풀어 주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여호와께 쉬는 날인데, 우리가 엿새 동안 하던 일들을 손에서 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쉼을 가진다. 개혁교회 전통에서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주일은 쉬는 날이고 또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날이라는 것이다. 칸트나 헤겔이라 마르크스는 노동을 굉장히 강조하고,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본다. 서양 근대 이후 전통은, 노동은 사람이 사회 속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성경은 노동을 자기실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가꾸고 가능성들을 개발하는 것에 두며, 동시에 그 노동을 쉴 때가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 주실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 안식은, 단지 노동으로부터 쉰다는 것 뿐 아니라,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쉬도록 함으로써 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사회적 불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한다. 결국 안식일은 예배드리기 위해서 구별한 주일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요, 동시에 일손을 놓고 하나님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날이다. 이 날에 안식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모두가 함께 쉬는 것을 통해서 과도한 착취와 가진 자의 권력 남용을 막는다.

2) 스탠리 하우어워스: 근로자들의 노동 시간이 늘어난 것을 생각한다면, 이 계명은 현세의 문화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또한 시간이 우리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세상을 향한 중대한 도전이다. 시간은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관심을 가지신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우리가 애쓸 필요가 없다는 신앙 고백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환영하시지만, 창조 세계에 대한 우리의 기여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이 안식하려면, 하나님을 든든히 신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안식일 계명은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시며 또 인간을 위해 행하실 일을 바라보도록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자신의 뜻을 이루시며, 인간을 위해 인간을 향한 자신의 사역 또한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인간에게 상기시킨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던 일을 멈춰 휴식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의 사역을 묵상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안식일의 경제적 함의는 무척 큰데, 안식일은 부자와 혹사당하는 빈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동물들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안식일 속에서는, 부자와 빈자 사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 안식일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초월해 영원 속에 잠시 머물게 함으로써, 우리의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에 구속되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시간 안에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데, 예배에서 우리는 시간을 취한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을 잠시 뒤로 하고, 오직 예배를 위해 시간을 낼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대단히 정치적인 선언을 하는 셈이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안식일은 서로에게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한다. 기쁜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육체노동이 아니라 안식이 노동이다. 기독교의 안식일은 말하자면 노예 해방 기념일이다. 이 날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의 문화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날이다. 우리는 이 날을 통해서 세상의 시간을 가져다가 하나님의 시간으로 바꾸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바꾸신 것을 기뻐하는 시간이다. 이날에 우리는 영원을 희미하게 본다.

3) 김용규: 평일이 존재물을 위한 날이라면, 안식일은 존재를 위한 날이다. 평일이 탐욕에 노예된 시간이라면, 안식일은 탐욕으로부터 해방된 시간이다. 일주일을 7일로 구분하여 이름 지은 것은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유래되었다. B. C. 13세기 중반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그 곳에는 이미 7일로 된 일주일 구분법이 있었다. 오직 히브리인들만이 제3계명이 정한 바에 따라 특별히 일곱 번째 날을 안식일이라는 거룩한 날로 지켰다. 성서에 주어진 설명들을 보면 안식이란 일단 무노동을 뜻한다. 이는 경제적으로 볼 때 수입의 상당부분을 포기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일은 당시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안식일의 의미를 무노동으로 파악하자, 무엇이 일인가를 정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와 건강과 복리를 보호해 주기 위하여 제정되었던 날이, 금령의 날이 되었다. 이런 행위는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자로 칭한 '존재'에게 전혀 합당하지 않았으므로 후에 예수가 이런 율법주의를 비판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주일이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 이다. 그리고 주일은 순서적으로는 일곱 번째 날이 아니고 여덟 번째 날이다. 결국 주일은 신이 창조를 마치고 휴식한 안식일과는 그 의미와 시기도 다르다. 바울 사도는 기독교인들은 주일을 지켜야 하며, 유대교 의식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복음에 역행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여덟 번째 날이 주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므로, 이 날의 의미는 무노동보다는 오히려 축제였다. 하지만 이런 입장과 달리, 주일을 안식일과 동일시하여 노동을 하지 않는 날로 인정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대표적인 이가 앨퀸이며,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러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에 반기를 들었던 17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주일과 안식일을 다시 분리했고, 주일의 의미를 안식일과 다른 것으로 규정했다. 이들은 삶에서 자신들의 몸과 영혼을 쉬게 하기 위해 일주일에 하루가 필요할 뿐 그날이 어떤 날이며, 그날 쉬고 안 쉬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중 오직 청교도들만은 주일을 다시 안식일과 같이 엄격한 무노동의 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상 가장 날카로운 안식일주의였다. 예수가 일찍이 율법주의를 비난하고 욕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람들은 자비보다 제사를, 신보다 우상을, 존재보다 존재물을 섬기길 즐겨하는 듯하다. 따라서 안식일을 단지 노동에서 벗어난 해방일로 해석하는 모든 고전적 해석들에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해석을 통해 보장되는 자유는 노동에서 벗어난 해방이라는 사회적 자유일 뿐이지, 스스로를 존재라고 밝힌 신이 부여한 존재의 자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안식이란, 우리의 관심이 무엇-됨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오로지 자신의 '있음' 에 관심을 갖고, 자신과 다른 모든 존재물들의 '있음'에 대해 놀라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만이 인간은 자신의 무엇-됨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걱정, 근심 그리고 불안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안을 맛본다.
아담의 죄는, 자신의 관심을 자신의 '있음'에 두지 않고 자신의 '무엇-됨'에 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신 안에 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신을 떠나는 것, 바로 이 존재 상실이 죄가 된다. 이것이 존재론적인 죄의 해석이며, 죄에 빠진 인간의 실존 구조이다. 그리고 이렇게 신을 떠난 인간은 존재 상실에서 오는 죽을 것 같은 불안감 탓에 존재물들의 무엇-됨을 향한 무한한 욕망에 이미 노예가 되어버려 도저히 안식할 수 없는 것이다. 칼뱅은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해방이 안식의 전제조건이자 안식일의 참 의미임을 분명히 하였다. 한마디로 안식일은 탐욕의 노예가 된 자기를 부인하는 날이다. 그럼으로써 존재물의 무엇-됨을 향한 무한한 욕망에서 벗어나는 날이다. 그 밖에 그날 일을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한 낫 부질없는 질문이다. 일요일에 쉬는 것이 모두에게 대항한 모두의 싸움을 위해, 권력, 영향력, 지위를 다투는 싸움을 위해 새로운 힘을 축적하려 하는 휴식이라면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설사 우리가 안식일에 쉬어도, 그것이 다음날에 열중할 무한한 욕망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다. 반대로 안식일에 격한 노동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무한한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구제 사업처럼 오히려 우리의 존재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을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4) 해석에 대한 평가: 개혁교회 전통에서, 주일은 쉬는 날이고 또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날이라는 강영안의 해석은, 안식일이 가지는 두 가지 특성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또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연결 짓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해석은 매우 통찰력 있다. 물론 안식일에 대한 세 명의 해석이 다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특별히 안식일에 노동을 쉼으로써 하나님을 찾게 되고, 가진 자들의 과도한 착취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세 명 다 동의하고 있다. 한국 교회 현실이, 여전히 주일에 무엇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일차원적인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생각할 때에, 약자들을 보호하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도 안식일의 목적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신앙의 개인적인 적용을 넘어 공동체적인 맥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다만 좀 더 현실적인 쟁점을 붙들고 고민하는 것은 김용규의 해석이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주일이 일을 하든지 안 하든지 상관이 없음을 밝힌다. 특별히 한국 교회 안에 늘 높이 평가 받는 청교도들이, 안식일을 엄격한 무노동의 날로 만들었다고 정확하게 비판한다. 그는 안식일에 일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은 탐욕을 버림으로 하나님이라는 존재 안에 안식하는 날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이 부분이 김용규의 가장 탁월한 부분이다. 그는 무엇이 핵심인지 알고 있다. 즉 참된 안식의 핵심은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수동적인 태도가 적극적인 태도로 변화된다. 하나님 안에서 탐욕을 버리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안식이다. 특별히 안식 가운데 중요한 것은 강영안의 주장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인데, 앞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은 과연 이 안식이라는 맥락에서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가이다. 또한 실질적인 예배의 내용 가운데, 이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목회적 고민이 필요하다.

  5) 목회에 있어 적용점: 인간이 육체와 영혼을 가졌고, 그것이 하나 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안식일에 대하여 목회적인 관점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먼저 육체적인 휴식이다. 그것은 특별히 한국적 맥락에서 중요하다. 주 5일제가 도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의 많은 직장들은 야근을 포함하여 매우 많은 근무 시간을 성도들에게 요구한다. 최근에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연 평균 근로 시간은 OECD 국가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2위이다. 세 명의 저자들이 주장하는 어떤 철학적이고 이상적인 안식일에 대한 개념을 목회적으로 적용하기 이전에, 그 안식이라는 단어가 가진 본질적인 쉼이라는 개념을,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지나치게 피곤한 상태에서 그 현실을 무시하고 교회 가운데 실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야기이다. 일주일동안 세상 가운데 혹사당한 육체는, 적어도 하루 동안이라도 쉼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본질적으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취한다는 것을 동의하지만, 그러나 그 예배조차도 육체적인 쉼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목회적인 관점에서 육체적인 쉼을 포함한 하나님 안에서 안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무엇인가 과시하고 보여주기 위한 행사 중심적인 예배가 교회 안에서 만연하게 된다면, 실질적으로 성도들은 그 예배 역시 본인들이 일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지나친 부담감 속에서, 오히려 육적인 피로만이 가중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목회적으로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쉼과 채움이 된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는, 그리고 그것을 성도들에게 경험케 하는 성찬이 예배 가운데 많이 약해져 있다는 것이다. 일회적인 거창한 행사는 많아 졌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육적인 공급을 채워주시는 성찬은, 오히려 비정기적인 행사가 되었다. 특별한 행사를 포함한 예배, 다시 말하자면 성도들이 주중에 지친 몸을 이끌고 준비해서 무엇인가 화려한 것을 만들어야만 하는 그런 예배들은 오히려 늘어났다. 진정한 안식일의 의미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행사 중심의 예배를 목회적으로 지양해야 한다. 성도들에게 영적인 쉼 뿐 아니라 육적인 쉼도 주어야 한다.



5.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1) 강영안: 아버지와 어머니는 통칭이기 이전에 호칭이다. 즉 우리를 키워 준 그분들을 공경하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공경한다는 것은, 히브리어 카베드로 중히 무겁게 여기라라는 뜻이다. 즉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리에 모실 때도 소중한 자리에 모시라는 의미이다. 부모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르라는 의미이다. 또한 부모가 나이 들었을 때에, 부모를 부양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주 안에서 라는 조건이다. 즉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한다면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자녀에게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부모가 자식을 길렀기 때문에, 양육할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알고 실천할 때에 권위가 행사될 수 있다. 과거에 교육의 초점이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이었다면, 현대 교육은 자녀 중심 교육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가 권위를 가지고, 자녀가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고 말한다. 이러한 권위는, 국가이든 기업주이든 부모이든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권위는 신성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 권위는 제한된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사람이 이 권위를 자기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카이퍼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한 결과 주어지는 장수와 물질적인 복을 공동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 약속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2) 스탠리 하우어워스: 프로이트는 자신을 낳아준 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며, 치료를 통해 스스로 우리 자신의 창조주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배꼽만큼 우리를 존재론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없다. 바로 이것이 이 계명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십계명은 인간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주목한다. 인간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부모의 자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이 계명은 부모 된 어른들에게 그 부모가 그들을 책임졌듯이, 그들이 책임져야 할 자녀들을 양육하되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기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숭고하고 영예로운 소명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창조 행위를 지속하신다. 또한 우리는 가족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참된 가족, 곧 교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교회에서 부모는 생물학적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탄생한다. 따라서 어린 아이가 세례를 받을 때, 교회 전체가 아이의 친 부모뿐 아니라 아이 자신의 믿음까지도 든든히 세워 주며 책임 의식을 가진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가정 가운데 올바른 권위에 대한 인식을 심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이 거듭 주장하는 바는, 어떤 행위는 실제로 행복과 장수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눈여겨보시며, 순종에 따른 보상을 하기 위해 기꺼이 자세를 낮추신다.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장수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충실한 삶에 대한 보상이며, 충실한 삶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삶이다.

3) 김용규: 인간이 올바로 산다는 것은 각자 자신을 잊고 맡은 역할에 몰입하는 것이고, 우리의 삶은 이러한 연기 실습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려고 하면 된다 이다. 이 말은 할 수 있으면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면 할 수 있다는 사유를 전제로 한다. 이 계명을 성서신학의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만 해석한다면, 데칼로그 4편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존재에 근거한 인간적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칼뱅에 따르면, 이 계명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권위에 대한 복종과 겸손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복종하는 자의 유익이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쉽게 복종시킬 수 있을 만큼, 즉 그들이 자신들보다 위에 있는 어떠한 권위에도 단순하게 복종할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해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계명은 신이 인간의 본성인 교만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내린 것이다. 교만은 자신을 높여 신에게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고, 모든 죄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것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다. 신이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론적 측면에서 보면, 교만은 존재를 상실 혹은 망각하게 하는 그것이다. 따라서 죄에서 벗어나 신에게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교만을 없애고 겸손해지는 것을 말한다. 모든 존재물은 그것이 존재물인 한 '존재의 진리', 곧 말씀(logos)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상숭배와 같은 온갖 탐욕에 빠진다. 복종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 바로 이것이 복종의 기독교적 의미이자 존재론적 의미이다. 네 생명이 길리라 라고 한 이유는 그 유익이 공경하는 자식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자신의 교만한 본성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교만한 본성을 복종시키지 않고는 생명을 길게 보존할 수도 없고, 신에게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런데 이것을 가장 자연스럽고도 우호적인 방법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바로 부모 공경이다. 바로 이러한 훈련을 통해서 인간은 살인도, 도적질도, 간음도, 거짓 증거도, 이웃에 대한 탐심도 피할 수 있다. 이것이 제4계명이 둘째 석판에 새겨진 계명들 중 으뜸이 되는 자리에 위치한 이유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종이란 패배나 자기부정이 아니고 오히려 승리이며 자기 긍정이다. 인간은 복종을 통해 신에게 돌아가며, 복종을 통해 존재를 회복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정하는 비굴함이 아니고, 오히려 부정을 부정함으로써 긍정에 이르고자 하는 용기이다. 복종은 마땅히 복종하는 자의 자기 승리와 동시에 스스로 유익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복종의 대상이 무엇이든, 가령 교회의 권위라 할지라도 신에 합당치 못하다. 이런 복종은 단지 '권위' 라는 새로운 우상에 다시 '종 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복종에 은폐된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기독교적 복종은 본질적으로 억압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유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억압하며 무한한 욕망에 종 되게 한 교만을 스스로 초극하게 함으로써 존재의 자유를 부여케 한다. 이러한 복종은 오직 절대적 자유자인 '존재' 에만 종 되게 함으로써 다른 그 어떤 존재물들에게 종 되는 것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극복으로서의 공경이란 공경하는 자에게 무한한 유익을 준다. 교만에서 해방되어 자기극복으로 얻어지는 자유가 그것이다. 신은 그의 백성에서 이러한 해방과 자유를 부여하기 위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내린 것이다.

4) 해석에 대한 평가: 공경한다는 것이, 중히 무겁게 여기라라는 뜻이라는 강영안의 해석은, 매우 명쾌하고 또 적용적이다. 또한, 성경은 부모가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고 선포한다는 강영안의 지적은, 특별히 학교와 사교육에 자녀에 대한 모든 것을 맡기는 한국적인 맥락에서 매우 의미 있는 지적이다. 교회에서 세례라는 과정을 통해서 모든 성도가 믿음의 자녀들의 부모가 된다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해석은 매우 유익하고 또한 탁월하다. 사실상 이 부분은 한국 교회 안에 매우 부족한 부분으로, 믿음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을 때마다, 교회의 모든 어른 성도들의 세례 받은 자녀의 신앙 성숙에 책임이 있음을 목회자가 마땅히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김용규의 해석을 선호한다.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가진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지적하고, 하나님께서 그 교만을 극복시키는 수단으로 이 계명을 주셨다는 해석은 매우 탁월하다. 특별히 존재물인 인간이 존재의 진리 즉 말씀을 따라가야 하며 복종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과 그 당위성에 대해서 잘 알려준다. 그리고 부모를 잘 섬기는 자녀들의 생명이 길 것이라는 부분을 해석하면서, 이 계명의 유익이 공경하는 자녀에게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은 훌륭하다. 십계명이 억압의 계명이 아니라, 생명과 복을 주기 위한 계명이라는 그의 주장을 잘 나타내는 해석이다. 특별히 기독교의 복종이 패배나 자기부정이 아닌 승리며 자기 긍정이라는 그의 해석은 매우 탁월하다. 김용규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복종을 매우 비참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교만을 극복하고 자유를 얻게 된다는 놀라운 통찰을 제공한다. 결국 십계명이 존재물들에게 종 되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그의 일관된 주장은, 계명이라는 일견 어두워 보이는 내용을, 매우 달콤하고 또한 소중하고 반드시 지키고 싶은 그 어떤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5) 목회에 있어 적용점: 목회적으로 이 계명은, 특히 믿지 않는 부모를 둔 성도들에게 중요하다. 믿는 부모를 둔 성도들은, 부모를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서 큰 괴리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부모를 둔 성도들은, 부모를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 사이에서 큰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부모가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믿는 자녀의 생각과 가치관이 부모와 심각하게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러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성도가 믿지 않는 부모와 잦은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자신의 믿음 없는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자녀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근본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국적인 맥락에서 명절은,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날이다. 그래서 타지에 있는 자녀들은, 부모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서 찾아온다. 그러나 만약 믿음의 자녀가, 믿음이 없는 부모와의 충돌을 싫어하여 명절에 부모를 찾아뵙는 인간적인 도리조차 저버리게 된다면, 목회적으로 그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가가 매우 중요해 진다. 이런 경우, 목회자는 그 믿음 없는 부모를 향한, 자녀의 헌신과 사랑을 더욱 강하게 가르쳐야 한다.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그 말씀이 부모에게 적용됨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김용규가 주장한, 기독교의 복종이 승리라는 명제는, 믿지 않는 부모를 둔 자녀들에게, 그들의 삶 가운데 더 깊은 복음에 대한 적용이 된다.



6. 6계명: 살인하지 말라

1) 강영안: 6계명은 대상이 사람인지, 동식물까지 다 포함되는지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최근에 나온 번역들은 거의 대부분 살인하지 말라 라는 맥락으로 번역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식물이나 동물을 먹을거리로 삼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잘 헤아려서 이 권리를 사용해야 하고, 욕심을 따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생명 자체가 하나님 손에 있다는 맥락에서 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살인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지식과 의와 거룩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에서 찾는다.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연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예배할 수 있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책임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도 있다. 슈바이처나 라이프니츠는, 생명에는 최고 가치가 부여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생명이 모든 것 위에 있는 가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성경은 모든 종류의 죽음을 금하는 것은 아니며, 불법적인 죽음, 불필요한 죽임을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부분이다. 또한 이 계명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살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 가운데 생명을 돌보며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2) 스탠리 하우어워스: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누군가를 죽이는 살인 행위는 개인에 의해 혹은 국가에 대한 봉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하나님만이,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은 이 계명을 언어폭력과 분노까지를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하신다. 즉 예수님 안에서 계명들은 강화되고 확대되며 확장된다. 루터는 계명들이 의도하는 바가, 우리를 충격으로 몰아넣어 자비하신 하나님의 품으로 몰아가게 하려는데 있다고 말한다.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죄의 결과이다. 십계명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고 동물들을 죽이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일깨운다. 때문에 육식을 거부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데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또한 5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폭 넓은 관계에 대해 고찰하도록, 우리가 평화적인 백성이 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고찰하도록,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공생할 수 있는 백성으로 만들어 달라고 교회에 요구하도록 한다. 이 계명은 믿음의 공동체가 이러한 계명들에 의해 형성될 뿐 아니라, 그 계명들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됨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이러한 계명들이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려면 결속된 삶을 보여주는 공동체, 서로 화해하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상대방을 대할 줄 아는 공동체가 전제되어야 한다. 교회는 갈등이 없는 장소가 아니라, 고백과 화해의 수단, 대결과 용서의 수단을 받은 백성이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구약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전쟁들은 바람직한 것으로 찬양되기 보다는 오히려 죄에 굴복한 결과로 묘사된다. 신약에 오면, 그리스도인들은 살인의 주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적으로 살인의 대상이 된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생명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생명이 본래 거룩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국가라 할지라도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기에, 십계명은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 것을 매우 담대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3) 김용규: 살인이란 존재론적으로 보면 소외에 불과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죽음은 혼이 죽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에 쓰인 히브리어 동사 'rsh'는 승인 받지 못한 폭력적 죽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처녀 강간을 살인으로 보듯 '혼을 죽이는 행위' 그러니까 존재론적 살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때문에 이 계명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 영혼을 죽이지 말라' '존재론적으로 살인을 하지 말라' 는 말로 확장 해석된다. 예수는 형제에게 노하거나 욕하는 것이, 그리고 칼뱅은 이웃에 대하여 품는 모든 증오와 노함, 원한 등이 그들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나 존재론적 살인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소외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매우 유용하다. 소외란 주위와 분리됨 또한 화해되지 못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심리적이고 사회적 개념이다. 즉 인간적 관점에서 조명되고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에서 죄인으로 칭하는 인간 실존은, 신의 입장에서는 또는 존재론적 입장에서는 신을 떠난 상태이지만, 이것을 인간적 입장에서 보면 신으로부터, 또 다른 여러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결국은 그 자신으로부터 심리적으로 소외된 상태이다. 죄란 소외의 종교적, 존재론적 해석이고, 거꾸로 소외란 죄의 심리적, 사회적 해석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존재론적 살인을 '소외-시킴' 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해석한 계명은 '소외시키지 말라' 는 사회적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모태로부터, 낙원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미래에서 확실한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따라서 인간 실존의 근저에는 끝없는 불안이 있으며,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죽을 것만 같은 이러한 소외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각종 도취현상을 찾았다. 술이나 마약, 또는 신비주의나 주술적 종교 등에서 얻는 도취현상에 몰두하는 것도 소외감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다. 또한 소외감을 탈피하기 위한 노력이 사회적 집단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즉 어떠한 단체에 소속감을 가짐으로 원초적 소외감을 극복해 보려는 것이다. 혹은 자신이 종사하는 세계와 적극적으로 결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방법들은 부분적 혹은 일시적 해답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 결과 소외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은 여전히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도 강력한 갈망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이 욕구가 만족되지 못하면 인간은 타인과 사회를 파괴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파멸시킨다. 이렇듯 소외는 파괴적 구조를 스스로 갖고 있으며, 인간은 그 어떤 노력을 해도 타인으로부터 또 자신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이로 인해 사회와 자신을 파괴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공 야첵은, 이미 존재론적인 죽임을 당한 인간이며, 그의 살인 이전에 이미 야첵에 대한 살인이 있었다. 소외란 죄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리고 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는 점에서는 악과 다름이 없다. 단지 악이 능동적인 개념이라면 소외는 수동적인 개념이다. 소외는 당하는 것이고 악은 행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존재를 상실하면 할수록 소외되며 악해진다.
인간의 실존적 소외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오직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대상을 끌어안아 하나가 되려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존재물을 소외시킨다는 것은 그것의 존재를 배척하고 무시하는 것, 자기의 범주 안에서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사랑은 그것의 존재를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기의 범주 안에 있게 하는 것, 곧 그의 있음 자체를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소외란 개념을 달리 표현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사랑하지 않음' 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살인하지 말라 라는 제5계명의 적극적 해석이 이웃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하다. 소외된 인간 곧 존재에서 멀어진 인간은, 벌함으로써가 아니라 사랑함으로써만 악에서 빠져 나오게 할 수 있다. 사랑만이 존재로 접근하는 길이요,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신은 인간에게 '악으로부터의 자유'를 내리기 위해 이 계약을 맺었다.

4) 해석에 대한 평가: 강영안의 해석에서, 동물에 대한 살인을 다루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권리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해석은 매우 적절하다. 다만 욕심을 따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어떤 것이 욕심을 따르는 것이며, 어떤 것이 욕심을 따르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적절한 예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가죽과 털을 사용하기 위해서 동물을 죽여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정직한 질문이 필요하다. 일반인들 혹은 연예인들이 앞장서서 하는, 단순히 동물 보호 차원에서의 모피 옷이나 가죽 옷을 입지 않는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교회적인 차원에서 해석된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해석의 탁월한 점은, 그는 계명의 실천의 장으로서의 교회를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십계명을 단순히 개인에게 적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동체에 주신 것으로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이 계명을 해석하면서, 교회가 화해와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이것은 매우 탁월한 해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김용규의 해석을 선호한다. 살인이라는 표면적인 결과가 아니라, 살인이 일어나게 되는 그 이면과 의미까지 살펴본다는 점에서 그의 해석이 가장 탁월하다. 살인이라는 것은 사실상 소외로부터 일어나며, 특별히 죄와 소외가 사실은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통찰이 놀랍다. 이 소외라는 렌즈를 통해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지를 잘 조명하고 있다. 김용규의 해석은 언제나 현대 사회가 이 계명과 연관 되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다. 그에게 있어 사회에 만연한 도취 현상과 소속에 대한 집착은, 결국 소외감을 탈피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그러한 것으로는 소외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오직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나 감동적이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예를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그 대상을 끌어안아 하나가 되려 하는 힘이라는 그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너무나 탁월하다. 김용규의 해석을 통해서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그 해결책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5) 목회에 있어 적용점: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해서 소외라는 것과 연결 지은 김용규의 해석은, 목회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적용점을 가진다. 한국적인 맥락에서 신앙을 논할 때에 아쉬운 점은, 공동체성이 너무나 약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성숙 혹은 성화의 과정을, 한 개인이 지식을 더 많이 배움으로 깊은 성찰을 얻어서, 더욱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신앙의 삶이라는 것을, 이러한 개인적인 지적인 성숙의 맥락에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실질적인 엄청난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성도로서 아무 자각 없이 살아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목회적으로 보았을 때에,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더라도,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회중 중에 누군가 소외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 가운데 살인이 일어나는 너무나 모순되고 비참한 상황이다. 특별히 대형 교회로 수평 이동이 심각한 한국적인 맥락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관계성 없이 홀로 예배 드리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이러한 가정은 얼마든지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적인 지도 가운데, 끊임없이 교회의 공동체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서로 교제함과 성도 간에 깊은 관계성의 실천 되어야 한다. 더욱 실제적으로는, 어떤 이가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을 때에, 그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 여러 관계를 능동적으로 맺어갈 수 있도록 소그룹을 포함한 공교한 장치들을 만들어야 하고, 그 누구도 홀로 소외 되어 떨어지지 않도록 수시로 점검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7. 7계명: 간음하지 말라

1) 강영안: 성경에서 간음은, 타인의 재산권 침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명예에 대한 침해이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결혼 질서에 대한 침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7계명은, 독일어나 네덜란드어 번역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결혼을 깨뜨리지 말라 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구약만을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은 혼전 관계에 대해서 기독교 전통보다 훨씬 느슨하지만, 신약 성경은 분명하게 간음 뿐 아니라 모든 음란 행위를 금하고 있다. 그러므로 7계명은 결혼 생활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정을 아름답게 가꾸라는 명령으로 확대해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7계명의 전제가, 하나님이 결혼 제도를 세우셨다는 사실이며, 이러한 부부의 관계는 자연적인 관계가 아니라 약속에 따른 관계, 즉 언약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홀로 계시지 않고 삼위일체로 계신 것처럼, 남자와 여자로 지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람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고 함께 삶을 나누는 존재로 지어졌다. 창세기 1장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은, 문화 명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산 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 맥락에서 결혼에서는 성관계가 중요하다. 성욕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사용되어야 하고, 이것은 전적으로 배제적 관계로 마음껏 서로 즐겁게 해주도록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으셨는데, 여기서 돕는 것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힘이 되어 주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의미의 조력자이다. 그만큼 요긴하고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간음하는 행위 뿐 아니라 음욕을 품고 상대방을 보는 것 자체가 간음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따라 성도는 자기를 쳐 죽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자기가 눈이 없는 것처럼, 그리고 실제로 손과 발을 잘라 내어서 불구가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2) 스탠리 하우어워스: 어떤 신들은 인간의 몸이 어떻게 남용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의 몸의 행위와 육체의 일에 대하여,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계신다.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은 마태복음 5:27-28절의 렌즈를 통해서 제6계명을 해석한다. 루터는 하나님이 간음 금지 계명을 십계명에 포함시킴으로써 결혼 생활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주목한다. 이 계명에서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삶과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여주신 성실함을 어느 정도 드러낼 기회를 갖는다. 부부가 결혼생활을 충실히 하는데 필요한 기술, 이해심, 고백 및 용서는 교회를 향해 신실하신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과 유사하다. 때문에 배우자에게 죄를 짓는 것은 남편과 아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굳이 결혼을 해야 그리스도에게 신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결혼해야 하는 단 하나의 바람직한 이유라면, 독신일 때보다는 기혼일 때 세례에 따른 소명의 삶을 보다 훌륭하게 살아 낼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결혼 언약은 투명한 의사소통을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관계가 흔들린다고 생각되는 그 배후에는 거짓말이 있다. 결혼이야말로 온통 거짓투성이인 세상에서 상대방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최초의 경험이다. 그리하여 결혼은 세례 받은 이들의 특징인 언어의 진실함을 연습하는, 교회 안의 장이 된다. 성적인 죄로 인한 어떤 상처는 시간이 지나 지난 일을 후회하게 될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그 죄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진실한 삶을 살아 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훼손한다. 사실상 모든 교인이 세례를 통하여 부모의 책무를 지게 된다. 자녀에 대한 열린 마음은,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 하시며, 미래의 역사를 쓰신다는 우리의 믿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이, 종잡을 수 없는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 제6계명은 불가능한 요구가 아니라, 평범한 이들로 하여금 평생 부부 간의 정절을 지킨 비범한 성자가 되라는 은혜로운 초대이다.

3) 김용규: 역설의 본질은 적어도 두 가지 의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왜 신은 부단히 간음을 금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런데도 왜 인간은 끈질기게 그것을 어기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칼뱅은 이 계명의 본래 뜻을 모든 부정한 성행위 뿐 아니라, 결혼 안에서라도 무절제한 성생활은 옳지 않으며, 절제와 정결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난잡한 성생활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행위나 취향까지도 경계해야 한다고 엄격하고 폭 넓은 금령으로 확대하였다. 이러한 논리를 따라 음란한 의상, 난잡한 언어, 춤, 음주까지도 하나님의 징벌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나친 확장 해석은 후일 청교도들에 의해 새로운 율법주의로 탈바꿈되어 인간을 억압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십계명은 신이 인간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사로잡아 억압하는 것들로부터 해방시켜, 그 자신의 본성인 존재의 자유를 부여하기 위해 그 스스로 인간들과 맺은 계약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칼뱅의 금욕주의적 해석은 과장된 것이다. 따라서 이 계명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은, 칼뱅이 수많은 금지로 해석했던 부분들을 자유와 은총으로, 존재물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금령들을 존재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권유로, 부정문들을 하나의 긍정문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간음하지 말지니라를 네 이웃을 사랑하라로 바꾸는 작업이다.
간음이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성적 탐욕의 산물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사랑은 탐욕적이다. 욕망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가진 삶의 형식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다. 오직 그 대상에 따라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희망적이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하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사랑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피조물들에 대한 하향적 사랑인 쿠피디타스(cupiditas)이고, 다른 하나는 신에 대한 상승적 사랑인 카리타스(caritas)이다. 카리타스나 쿠피디타스 모두 그 대상으로부터 무엇인가 자신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한 사랑이다. 카리타스란 존재에 대한 사랑이며, 쿠피디타스는 존재물들에 대한 사랑이다. 카리타스란 존재물의 있음-자체에 대한 사랑이며, 쿠피디타스는 존재물들의 무엇-됨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은 이 두 가지 사랑 중에 선택해야 하는데, 이 선택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우리 자신이 사랑의 대상에 일치하여 변화되기 때문이다. 카리타스의 대상인 신은 절대적 존재이며 절대적 선이다. 자기 충족적이고 결핍을 모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안식이다. 그러므로 카리타스도 인간을 점점 더 자기 충족적이고, 결핍을 모르게끔 하며 선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안식과 변함없는 만족을 준다. 이에 반해 쿠피디타스의 대상인 피조물이란 불완전하고 결핍된 자이며, 악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일시적 존재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사랑인 쿠피디타스도 우리를 점점 더 불완전하게 하고, 결핍되게 하며, 악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일시적 존재로 만든다. 존재물에 대한 사랑인 쿠피디타스는 콘큐피스켄치아(concupiscentia)와 연결된다. 성적 탐욕 또는 세상을 향한 탐욕을 의미하는 콘큐피스켄치아도 궁극적으로는 존재물에 대한 사랑이고, 악의 근원이다. 그런 점에서 쿠피디타스와 콘큐피스켄치아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에 인간 실존의 비참함이 있다. 사랑이라 부르든 욕망이라 부르든 인간은 단지 콘큐피스켄치아, 곧 성적 탐욕과 현세적 탐욕의 노예이다. 바로 이것이 그 많은 교훈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음행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이다.
성적 탐욕 같은 불합리한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은 육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즉 대개 불안이나 억압을 해소시키고자 하는 정신적 공복에서 오는 것이다. 즉 성적 교접, 재산, 명예, 지배, 복종, 시기, 질투심 등에 대한 과도한 욕망들은 모두 왜곡된 인격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역기능이며, 이들을 충족시킨다고 해서 영원히 만족되지는 않는다. 이런 종류의 쾌감이란 한없이 강도를 높여야 하는 일종의 중독과 같기 때문에 결국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신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러한 자기 파괴적 성적 탐욕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려고 제6계명을 내린 것이다. 성적 교접이 예배의 한 방법이었던 종교가 널리 유행하던 당시, 이러한 예배 형태는 물론이고 간음 금지 계명을 통해 성적 순결을 요구하는 형태의 종교적 선포는 당연히 위험한 모험이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콘큐피스켄치아 또는 쿠피디타스에 대한 첫 번째 종교사적 도전이자 승리이다. 생산의 힘을 신성화하는 종교나 풍습이란 결국 존재물에 대한 사랑 곧 콘큐피스켄치아, 쿠피디타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적 탐욕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어거스틴에 따르면 한마디로 하수관으로 흘러가는 물을 정원으로 끌어가시오 이다. 우리의 사랑을 존재물에 대한 사랑인 쿠피디타스에서 존재에 대한 사랑인 카리타스로 바꾸라는 것이다. 사랑을 정결하게 하는 것, 이것이 답니다. 결국 간음하지 말라 라는 부정문 형식의 엄격한 금령이, 카리타스를 하라 곧 존재에 대한 사랑을 하라 라는 긍정문의 권유로 다시 태어난다.
4) 해석에 대한 평가: 간음하지 말라라는 소극적인 계명을, 결혼 생활을 아름답게 가꾸어라 라는 적극적인 명령으로 해석한 강영안의 해석은 매우 힘이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과 육체의 일에 대해서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있다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해석은, 이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기반해 있다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독특성을 잘 드러낸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중에서도 김용규의 해석을 선호하는 이유는, 계명에 대한 그의 접근법은 매우 탁월하고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용규의 해석만은, 성경이 그토록 많은 성적인 죄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이유를, 그리고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서 인간이 실패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칼뱅의 금욕주의적 해석이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파격적이다. 그러나 그의 논리 가운데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별히 어거스틴이 사용한 사랑의 형태인 쿠피디타스와 카리타스를 이 계명에 도입한 것은 좋은 해석이라 생각한다. 우리 자신이 사랑의 대상에 일치하여 변화된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대한 인용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성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그 핵심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성적인 탐욕 역시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쿠피디타스라고 설명하는 부분은 매우 탁월하다. 욕망이 정신에서 기인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충족시킨다고 해서 영원한 만족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결국 간음하지 않기 위해서는, 존재물에 대한 사랑을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어야 하며, 그것이 이 계명이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임을 잘 설명하고 있다.

  5) 목회에 있어 적용점: 목회적인 적용점 가운데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현시대의 결혼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타락 했는가를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대중 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결혼관은, 절망 그 자체이다. 혼전 성관계에 대한 연예인들의 공공연한 인정, 결혼 후에 외도를 아름다운 로멘스로 치장하는 드라마와 영화 등, 성경적 가치관과 너무나 멀어져 있는 현시대는, 목회적으로 매우 암울한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목회적인 프로그램 가운데, 결혼의 소중함에 대하여서 매우 자주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회성 행사로 그쳐서는 안 된다. 결혼 혹은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단순히 삶 가운데 중요한 행사 정도가 아니라, 참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필수적인 과정임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부부의 충실한 결혼 생활을 위해 필요한 기술, 이해심, 고백 및 용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우는 것과 유사하다고 설명한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즉, 참된 결혼 생활이, 참된 성도로서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목회적으로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우 어렵지만, 이 계명은 실제적으로 목회자의 가정 가운데 먼저 실현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먼저 연습하고 노력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 목회자가 먼저 부부의 관계의 모든 면에서, 깊은 신뢰와 소통과 행복을 경험할 때에, 성도들에게 결혼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결과들을 보여줄 수 있다. 특별히, 바쁜 목회 일정으로 가정을 쉽게 소홀하게 되고, 또한 동시에 많은 여자 성도들을 대하는 한국 목회자의 현실 속에서, 사역보다 가정을 우선순위에 두기 위해 노력하고, 또한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아내를 절대적으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세워주고 아껴줌으로써, 교회 가운데 간음을 금하는 소극적인 목회 지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참된 결혼 생활의 소중함을 보여주고 권면하는 적극적인 목회 분위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8.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1) 강영안: 도둑질하지 말라 라는 계명에 관하여, 사람을 도적질하지 말라 라는 해석이 있다. 개혁파 신학자인 후치우스는 이 계명을 어기는 예로써, 천주교가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빼앗아 수도원에 집어넣는 것을 언급했다. 또한 식민지를 개척해서 그곳 사람들을 노예로 파는 것도 언급했다. 그리고 구걸을 시키기 위해서 어린 아이들을 약취하거나 혹은 부모의 승낙 없이 처녀를 훔쳐 가서 결혼하는 것도 언급했다. 물론 이 계명은, 사람 도둑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도둑을 금하는 계명이다. 즉 남의 것을 빼앗는 것뿐 아니라, 거짓이나 속임수, 간계를 통해서 남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금하고 있다. 성경 역시 이러한 도둑질을 끊임없이 언급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광고 역시 이러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절도 위에 바탕을 둔 사회인지도 모른다. 8계명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이웃에게 행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울 수 있도록 성실히 일하라는 권면을 담고 있다. 소유권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이 있지만 성경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는 것은 임시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빌려 쓰고 하나님의 것을 맡아 사용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을 하나의 상징과 제도로 표현한 것이 희년 제도이다. 또한 부라는 것이 사회적 공유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우리에게 주신 재산은 나 혼자 누리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가난한 자, 비참한 자는 네가 책임지고 함께 살아가야 할 동료라는 생각이 성경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성경은 분명히 재산의 소유권을 인정하지만 무제한의 사유권이나 무제한의 권리는 정당하지 않음을 여러 본문을 통해서 보여 준다. 신약 성경은 부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상을 주지만, 부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이지는 않다. 문제는 부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선될 수 있기에 경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돈만큼 확실하게 우리의 존재를 보장해 주는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돈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법은 거래 관계를 벗어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인데, 이것을 성경에서는 은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도둑질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우리가 가진 것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가지려고 할 경우, 결국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러므로 온전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자족이다. 또한 삶 가운데 검소와 절제가 필요하다.

2) 스탠리 하우어워스: 에베소서 저자는, 도둑질하지 말고 선한 일을 하라고 권면하는데 그 이유는 재산이,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서이기 존재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 세상이 하나의 절도 체제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는 실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도둑질이 스며들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가장 버거운 계명은 도둑질과 거짓말을 다루는 계명들이다. 왜냐하면 이 계명들이 우리의 삶이 토대를 두고 있는 거짓된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칼뱅은 도둑질을 살인과 연관시키며 부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가난한 이웃들을 학대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으며, 이를 견디다 못한 그들이 도둑과 살인자로 전락하는 현실을 주목한다. 또한 그는 도둑질이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점차 악해지고 있음을 주목한다. 도둑질로 재산이 늘어나자 사람들이 그에게 빌붙어 약간의 이익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도둑은 선망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이 세상이 없어지지 않는 한 사람들은 도둑질로 높임을 받는다. 현대 사회의 특이한 병리 현상은 마땅히 공동체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을 사유화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기만 하지 이 말씀을 지침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지침이 우리의 삶에서 구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는 도둑이 될 수밖에 없다. 칼뱅은 단순히 부를 축적하려는 마음을 버리는 것보다는 구속함을 받은 부자가 되는 편이 낫지만, 그렇더라도 우리의 심령은 가난해야 한다고 했다. 절제-말하자면, 세상 제물을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와 정의추구-이웃의 재물을 빼앗으려는 욕망을 억제하고 그들의 몫을 돌려주고자 하는 것-야 말로 우리가 도둑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방편이다.

3) 김용규: 영화의 내용으로 보면,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제7계명을 단지 인간을 도적질하지 마라라고 해석했던 고대 유대 랍비들의 해석에 무게를 두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인간 도적질이라는 관점에서 제7계명을 이해하려면, 먼저 노예제도가 사라진 오늘날 인간 도적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아가 보다 근본적으로 도대체 인간이 타인의 소유물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점이 떠오른다. 인간이 타인의 소유물이 될 수 있어야 그것을 도적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인간을 노예로 사고파는 일은 없지만, 오늘날에도 목적과 의미가 바뀌었을 뿐 인간이 소유의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고용주에 의해 임금으로 평가 받고 고용되거나 해고된다. 이러한 사회제도 안에서 인간은 아직도 그의 있음 곧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의 무엇-됨으로 평가되는 존재물로써 취급되고 잇다. 자본가들은 임금을 통해 마치 고대의 군주들처럼 노동자들을 소유하길 바란다. 자본주의의 세련됨이란 이러한 구조를 강압적인 노예제도가 아니라 자발적인 시장의 원리에 맡겼다는 점일 것이다. 아이러니는 인간이 자기 자신도 기꺼이 타인의 소유의 대상이 되길 갈망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체제 속의 사람들은, 시장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에 맞춰 스스로를 매력적인 소유의 대상으로 상품화해야만 자신도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할 수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상실한다. 전통적인 가부장제도에서는 인간이 소유의 대상이 된다. 아직도 상당수 부모들이,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그들의 자녀를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한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를, 부모가 자식을 그의 소유물로 파악할 때, 아내 또는 자식의 있음 곧 그의 존재와 가치는 박탈된다. 즉 아내는 미모, 재산 등 아내로서의 그 무엇-됨으로, 자식은 학업성적, 장래성 등 자식으로서의 그 무엇-됨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아내 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랑 그들의 있음에 대한 사랑, 곧 카리타스가 아니라, 그들의 그 무엇-됨에 대한 사랑인 쿠피디타스가 된다. 결국 오늘날 인간 도적질은 단순히 유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을 하나의 존재물 곧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모든 행위가 인간 도적질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제7계명은 존재상실로 이어지는 바로 이러한 행위들을 금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삶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이라는 두 가지 대립하는 생존양식으로 구분된다. 소유양식이란 재산, 지식, 사회적 지휘, 권력 등의 소유에 전념하며 소유에 대한 탐욕과 그것의 상실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삶의 태도이다. 반면 존재양식이란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희열을 갖고 성장해 가는 삶의 태도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한 지난2-3세기 동안 언어를 기준으로 존재 형식에서 소유 형식으로 변하고 있다. 왜냐하면 소유가 현대 산업사회의 기본적인 생존양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자기 소유물로써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 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어떤 대상의 소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주체는 이미 내 자신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이 된다. 바로 여기에서 자아상실, 존재상실이 발생한다. 그런데 내가 가진 것은 파괴되거나 혹은 가치가 없어질 수 있다. 내가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은 한 순간에 불과하다. 때문에 소유 양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소유에 더욱 집착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이것이 현대인의 정신 병리적 현상이다. 또한 어떤 대상을 소유양식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구속하고 감금하고 또는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배우자나 자녀를 소유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압박하고 약화시키며 질식시켜 죽이는 행위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의 양식을 소유양식에서 존재 양식으로 바꾸는 것만이 탐욕적, 착취적으로 흐르는 현대 사회를 파국으로부터 구하는 전제 조건이다. 존재 양식은 소유에 집착하고 속박하거나 속박당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유롭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대상을 파악하고, 타자와 주고받으며 함께 나누고 관심을 갖는 긍정적인 삶이다. 삶의 양식이 존재 양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으므로 상실에 대한 공포가 없으며, 자연히 타인에 대한 시기나 적대적 경쟁관계도 없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변하는 것은 불안에서 안정으로, 타인에 대한 적의에서 연대로, 쾌락에서 기쁨으로 바뀌는 길이다.
어거스틴은 향유와 이용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에 대해 설명했다. 향유는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랑이고, 이용이란 그것이 수단인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향유의 논법은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필요하다'이고, 이용의 논법은 '나는 네가 필요하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 이다. 향유에도 올바른 향유와 그릇된 향유가 있고, 이용에도 올바른 이용과 그릇된 이용이 있다. 즉 가치 있는 것은 향유의 대상이며, 가치 없는 것은 이용의 대상이다. 다른 표현으로, 가치 있는 대상을 이용하거나, 가치 없는 것을 향유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신은 향유의 대상일 뿐 이용의 대상이 아니며, 이와 반대로 세상은 이용의 대상일 뿐 향유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신을 이용하는 것과 세상을 향유하는 것은 모두 그릇된 것이 된다. 존재론적 표현으로는, 존재는 향유의 대상이지 이용의 대상이 아니고 존재물은 이용의 대상이지 향유의 대상이 아니다. 카리타스는 신을 향유하고 세상을 이용하려는 열정이며, 쿠피디타스는 세상을 향유하고 신을 이용하려는 열정이다. 결국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라는 계명은, 일차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소유욕에 대한 금령으로 이해되지만, 특별히 인간을 소유 가능한 존재물로 취급하고 그의 무엇-됨을 이용하려는 것을 막고, 인간 존재를 향유하는 기쁨과 자유를 그의 백성들에게 부여하려는 신의 의지이다.
모든 판단은 존재 곧 그의 '있음' 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 때문에 판단은 존재론적 영역을 가질 수 없다. 결국 인간을 존재물이 아닌 존재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즉 객관적 3인칭이라는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2인칭 대화 상대 곧 '그대' 로서 여겨야 한다. 2인칭은 매우 특별한 인칭이다. 세계는 존재의 세계이기 때문에 '나' 라는 1인칭과 '그' '그녀' 또는 '그것' 이라는 3인칭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대상화된 대상은 나에게는 그저 제삼자이며, '나' 에게 '그' 는, 그리고 '그' 에게 '나' 는 현존이 아니고 부재이다. 그러나 1인칭인 내가 3인칭과 어떤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그대' 라는 2인칭이 기적적으로 탄생한다. 이 관계의 인칭, 기적의 인칭에 의해서 세계는 존재물의 세계에서 존재의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 따라서 인간을 하나의 존재물이 아니라 존재로서 대하려면, 그 인간을 결코 객관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객관적 판단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은 그를 하나의 존재물 또는 타인으로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존재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이다. 사랑은 결국 사랑하는 이의 존재와 사랑받는 이의 존재를 하나로 묶은 존재이다. 사랑이란 '우리' 라는 공동존재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존재에 참여시키는 존재론적 관여 행위이다. 이처럼 '주는 것이 곧 받는 것' 이 되는 사랑이 아가페, 카리타스, 곧 복음적 사랑이다. 아가페는 '임에도 불구하고' 의 사랑, 다시 말해 미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이다. 결국 인간의 존재를 이용하지 말고 향유하기 위해서는, 오직 온전한 사랑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때문에 이 계명은 다시 '인간의 존재를 사랑하라' 또는 '온전한 사랑을 하라' 라는 보다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의미로 확대된다. 신은, 인간을 소유 가능한 존재물로 취급하고 그의 무엇-됨을 '이용' 하려는 탐욕에서 해방시켜, 존재를 '향유' 하는 기쁨과 자유를 부여하려고 이 계명을 내린 것이다.

4) 해석에 대한 평가: 강영안의 해석 가운데, 도둑질하지 말라 라는 계명을, 하나님의 것을 맡아 사용하는 청지기 정신과 연결한 것이 매우 탁월하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소유를 개인에게 종속시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대하는 논리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또한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역시, 강영안과 김용규처럼,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지적한다. 전체적으로는 김용규의 해석을 선호한다. 그는 강영안 그리고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존재”라는 관점으로 그 문제를 더 깊이 분석해 들어간다. 그는 현대 사회가 인간을 대하는 태도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자본주의 사회 가운데 인간은 소유의 대상으로 취급되고, 이것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물로써 취급 받는 것임을 설명한다. 이러한 해석은 그의 책 전체를 통해 흐르는 존재와 존재물이라는 해석과 매우 잘 부합이 되고, 현대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잘 나타낸다. 인간이 인간을 존재물로 대하는 그 순간 바로 이것이 계명을 어기게 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특별히 현대인이 가장 좋아하는 표현 중 하나인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 라는 말이 가진 의미를, 논리적으로 풀어 나가는 과정이 매우 놀랍다. 결국에는 이러한 말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에는 존재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는 그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어거스틴의 향유와 이용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탁월한 통찰이다. 결국에는 인간을 존재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수도 없이 판단하고 인간을 존재물로 받아들인 나 자신을 심히 부끄럽게 또 반성하게 만든다.

  5) 목회에 있어 적용점: 신앙의 삶이라는 것이, 단지 영적이고 추상적인 것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목회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신앙인이 도둑질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실질적인 질문을 통해서,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성도들이 스스로 살펴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시민으로서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재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훈련시켜야 한다. 특별히 한국의 맥락 가운데, 만약 성도들 가운데 기업의 CEO가 있다면, 직원들의 고용 방식과, 어느 정도의 월급을 주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라는 질문은, 도적질 하지 말라 라는 계명에 있어 좋은 적용의 예가 될 수 있다. 하청 업체 제도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이 계명은 큰 역할을 해야 한다. 만약 믿음이 있는 CEO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다단계의 하청을 통해서, 인건비를 줄여서 이득을 많이 취할 것인가에만 모든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교회 안을 살펴 볼 때 더 흥미롭다. 많은 부사역자들의 경우, 자신이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에 비하여 적은 사례를 받는다. 물론 교회의 재정적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그런 경우는, 바울 사도가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며 사역했던 것처럼 사역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교회가 재정적인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회에서 기업들이 하는 것처럼 인건비를 최대한 아끼는 것에 교회의 목표를 둔다면, 그것은 교회 내부에서부터 이 계명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실패하는 것이다. 교회가 최대한 많은 파트 사역자로 고용하고, 최소한의 인건비만 지급하는 것은, 사회에서 하청 기업을 통해서 계약직 노동자를 고용하여 인건비를 줄이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교회 안에서부터 이러한 철학과 관행이 용납되고 있다면, 어떻게 목회적으로 성도들에게 도적질 하지 말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런 맥락에서, 스텐리 하우어워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는, 이웃의 재물을 빼앗으려는 욕망을 억제하고, 그들의 몫을 돌려주는 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재물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재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 개인의 재산 축적이 성도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며,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베풀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부터 실천되고 시작되어서 성도들에게 보여져야하며, 또한 더 나아가 마땅히 성도들의 삶의 모든 정황 가운데 실천되어야 한다.



9.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 강영안: 이스라엘 전통에서 9계명은 법정에서 재판을 할 때 이웃에 대해서 위증하지 말라는 의미가 우선된다. 하나님께서 거짓 증언을 금하신 이유는, 증언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는 무서운 도구였기 때문이다. 9계명은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계명이다. 그래서 9계명의 기본 정신은 이웃 보호에 있다. 또한 이 계명은, 단지 법정에서 거짓 증거하는 것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거짓말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거짓 증거 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의 말을 왜곡되게 전해서는 안 되며, 혹은 남의 뒤에서 수근 거리거나 모함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루머의 시대라 불리는 현대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소식에 대해서 신중하게 듣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야고보서는 우리의 혀를 통제하는 것을 바로 경건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할 말을 통제하는 것은, 참말을 해야 할 때에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의 문제는 단지 윤리적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 문제이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그 가운데 인간의 근본악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악은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삶 속에서 죄를 멀리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비록 완전한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성화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어거스틴과 칸트는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경우에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중요한 일일 경우, 거짓말을 정당한 행위라고 평가한다. 법과 제도가 거짓말을 막는 것에 있어 매우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문제이다. 때문에 사회가 신뢰할 만한 곳이 되도록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노력해야 한다.

2) 스탠리 하우어워스: 칼뱅에 따르면,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말이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통해 훈련되지 않을 때 서로 진실을 말하도록 지음 받은 우리의 삶이 왜곡된다는 사실을 일깨우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 계명을 주셨다. 또한 칼뱅은 우리로 하여금 의사소통을 하신 것은 서로 돕고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거짓말보다 마귀가 더 좋아하는 죄는 없다. 우리가 가장 쉽게 하는 거짓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로 훈련되지 않은 사랑으로 거짓말할 때라는 것을 마귀는 잘 알고 있다. 거짓말이 가져오는 죽음은 치명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인 우리는 진실을 말하며, 폭력과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거짓을 폭로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교회가 정직하게 목회를 할 수 없다면, 공적 책임과 직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어디서 진실하게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교제의 기반인 과거의 거짓말들을 감추기 위해 또다시 거짓말한다. 우리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죄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길 원하지 않는 존재임을 고백해야만 한다. 거짓을 일삼는 세상에서 서로 진실을 말하는 백성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증언이 된다. 신앙을 버리면서까지 거짓된 세상에 자신을 맞추려는 교회는 세상과의 차별성을 상실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이어서 그 정체성 또한 의심받는다. 혀를 다스리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미덕이다. 진실한 말은 진실한 삶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진실함이라는 미덕은 삶의 방식뿐 아니라 말의 내용 또한 달라져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미덕이 없다면 신뢰는 불가능하다.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거짓의 세계로 점점 더 기이 빨려 들어갈 뿐이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아니라 마귀의 지시를 받는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보잘 것 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진실하게 살아 내면 거짓을 일삼는 이 세상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3) 김용규: 조피아 교수가 선은 모든 인간 안에 있다는 것과 인간은 자유롭다 하는 것, 그리고 신을 전제하지 않고도 선의지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나아가 그러나 남는 것은 고독과 공허함뿐이라고 대답하는 것 등에는 분명 칸트의 사유가 들어있다. 일반적으로 진리의 파악이나, 선, 미, 성과 같은 가치 평가에 있어서 직관을 그 근본기능이라고 보는 입장을 직각론 이라고 한다. 그 대표적 예가 칸트의 윤리학이다. 칸트는 하늘에는 별이 있고 가슴에는 도덕률이 있다는 유명한 말을 통해 인간에게 타고난 도덕률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이성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칸트의 도덕률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도덕률에 자기의 의지를 합치시키는 것은 이성적이고도 마땅한 일이다. 칸트는 자기 안전과 쾌락 그리고 행복 등에 대한 욕구들은 물질에서 나오는 것으로, 인간이 여기에 자신의 의지를 합치시키는 것은 곧 물질에 억압되는 것이지 자유가 아니라고 보았다. 반면 도덕률이란 이러한 자연적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덕적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의지의 자유는 도덕률의 존재 근거요, 도덕률은 의지의 자유의 인식 근거라고 칸트는 주장하였다. 우리가 도덕률은 인식할 때 그것이 아무리 실현되기 어렵다 할지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우리 스스로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너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너는 할 수 있다' 라는 칸트 윤리학의 숭고한 명제가 탄생한다. 칸트에게 있어, 근거 없는 인과 관계를 가정하여 도덕을 어기면 안 된다. 즉 기본 원칙은 선한 행위는 그 행위의 결과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또한 선의지는 오직 그 의욕 자체만으로, 즉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때문에 칸트의 도덕적 명제는 오직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정언명령이어야 한다. 선한 행위는 단지 의무이므로 칸트의 윤리학 체계에서 선행에 따른 보상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선하고 숭고한 것은 그것이 선하고 숭고하다는 그 자체로서만 사랑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칸트의 윤리학이 가진 하늘의 별 같은 숭고함이자 동시에 영원히 다가갈 수 없는 허무함이다. 칸트의 도덕률은 한없이 숭고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를 이끌 손 즉 구속력이 없다.
이 계명을 해석하면서 칼뱅이나 루터는 진리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것은 상식을 벗어난다. 즉 일반적으로 진리란 사실에 합당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평화적이고 건전한 혀가 하는 말이 진리라고 전혀 다른 종류의 진리 론을 펼친다. 여기에서 '진리란 과연 무엇이냐' 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는 사실과 진실 사이의 문제이고, 철학적으로는 진리와 윤리 사이의 문제이며, 신학적으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란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 철학에서는 이 문제를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으로 나누어 다룬다. 신학적으로는, 진리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과학적 진리 관과, 진리란 사실이 드러나게 하는 바탕이나 반석이라고 이해하는 종교적 진리관 사이에서 나타난다. 때문에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려고 한다면, 이 계명이 금하는 거짓이 사실에서 어긋남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진실에서 어긋남을 뜻하는지, 또한 그것이 사실판단에 관한 문제인지 아니면 가치판단에 관한 문제인지,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 진리 관에 입각했는지 아니면 종교적 진리 관에 입각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진리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라는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됐다. 이러한 진리는 다분히 경험적, 과학적 진리라 할 수 있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진리 이론들이 이 이론을 모태로 하고 있다. 그리스 전통의 진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과학적 진리이고, 히브리 전통의 진리는 루터, 칼빈이 말하는 종교적 진리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진리란 야훼의 말씀이고, 존재물들이 존재하게끔 하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드러난 사실' 에 관한 언급이 아니고 오히려 '드러날 사실' 또는 '드러나야만 할 사실' 들에 대한 언급이며, 말뿐만 아니라 행위에도 사실뿐만 아니라 진실에도 연관되어 있다. 이 계명이 금하는 것은 히브리적 진리에서 어긋나는 것이고, 단순히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어긋나는 것이며, 지금까지 드러난 것에 대한 거짓이 아니라 앞으로 드러날 것에 대한 거짓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진리가 상이하다고 해서 서로 전혀 무관하거나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볼 수는 없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플로티노스 그리고 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에서 진리는 언제나 재기억 내지 신앙을 전제로 하는데, 이 전제를 바탕으로 다른 모든 지식들이 나왔다. 이 전통 안에서는 그리스적 진리와 히브리적 진리, 존재물의 진리와 존재의 진리는 서로 대립적이지 않고 오히려 후자가 전자의 바탕이자 근거가 된다. 이를 일컬어 어거스틴은 신앙은 지식의 출발점이다 라고 했고, 안셀무스는 믿지 않으면 알 수도 없다 라고 표현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진리와 윤리는 서로 분리되는 것도 아니지만 굳이 분리하여 생각한다 하더라도 윤리가 진리보다, 실천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이데아 중 이데아를 '선의 이데아' 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이것이 기독교적 진리 개념에 합당하다고 파악하고 이를 그대로 계승했다. 그가 '신은 선하다' 고 할 때 생각한 것이 바로 선의 이데아이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는 단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진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의 진리, 과학적 진리, 존재물의 진리에 어긋나는 증언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이 계명은 그의 백성이 보다 근본적이고 참된 진리, 곧 인간이 존재 할 수 있는 반석의 역할을 하는 진리, 인간의 영혼과 삶을 진리와 가치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진리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4) 해석에 대한 평가: 가장 일반적인 해석으로 보자면,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해석을 선호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실한 삶을 통해서, 거짓을 일삼는 사회에서 진정한 힘을 가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이 부분에 있어 전적으로 동감한다. 특별히, 교회가 진실을 말하는 법을 배우는 장소라는 해석은, 그의 책을 통틀어서 가장 탁월한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조차 거짓이 횡행한다면, 어떻게 성도들에게 세상 가운데서 정직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단순히 진실을 말하느냐 아니야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영안의 해석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강영안은, 이 9계명의 배경을 제시하면서, 이것의 기본 정신은 이웃 보호에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9계명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논리 뿐 아니라, 그 계명이 적용되는 관계성이라는 장(場)에 대해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성에 대한 내용이 김용규의 해석을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김용규의 해석을 통해 알게 되는 사실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철학적으로 분석하자면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별히 칸트의 윤리학이 매우 숭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허무한 것임을 즉 보상이 없는 무신론의 내용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즉 그 안에서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논리는 있지만, 그 논리가 적용되는 관계에 대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김용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 전통의 진리와 히브리 전통의 진리의 가장 큰 차이이다. 비록 김용규는 그런 맥락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계명을 주시고 기쁨으로 지키는 우리에게 상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다시 한 번 감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성도사이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계명이며, 또한 그 목적과 결과 역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조정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김용규는 그의 해석을 통해서, 존재의 진리가 존재물의 진리의 근거와 바탕이 됨을 주장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십계명 전체를 통틀어, 김용규의 해석 가운데 가장 부족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추측하는 것은, 결국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진실은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을 큰 기초로 삼고, 그 안에서 사실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5) 목회에 있어 적용점: 목회적으로 이 계명의 적용점은, 교회 안에서 진실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다룰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설교적으로 먼저 본다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진실을 설교 가운데 얼마나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고, 그리고 목회의 실제까지 확장해서 적용한다면, 죄를 지은 성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에 우리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죄악된 인간의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다른 표현으로 거짓된 평화를 선포한다면, 사실상 복음 되신 그리스도를 강력하게 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한 우리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어떤 성도가 지은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후속 조치를 취하는데 실패한다면, 이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된다.
물론, 성도의 죄 지은 것에 대하여 정당한 후속 조취를 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적인 논리에 따라서, 반드시 진실만 드러나고 밝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러한 진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목회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목회적인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부분이다.
만약, 진실이 완전히 드러나야 하고 또한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징계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목회자로서 매우 어려운 점은, 그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고려하고,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 진실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한 후에, 교회 앞에 누군가의 범죄와 거짓을 드러내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임이며 목표이다. 특별히 교회 사역의 구조상, 만약 목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담당하던 성도가 큰 죄를 지을 경우, 그것에 대하여 진실을 밝히고 드러낸다는 것은, 목회자의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목회는 매 순간, 거짓 증거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그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말한 것처럼, 교회가 정직하게 목회를 할 수 없다면, 공적 책임과 직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진실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가 성도로서의 참된 삶을 배우는 모판이라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논지는 매우 통찰력이 있다. 비록 그 과정은 많은 댓가 속에서 고통스럽겠지만, 모든 거짓을 드러내고 진실을 밝혀가는,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목회적인 일련의 과정 속에서, 결국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의 실제 삶 가운데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10. 10계명: 탐내지 말라

1) 강영안: 탐낸다는 것은, 단지 관심을 둘 뿐 아니라 자기 손에 넣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내면의 상태라고만 할 수 없다. 행동으로 옮아갈 가능성을 이미 그 속에 품고 있다. 또한 탐심은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우리의 욕망을 부정하고 버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어딘가를 향하게 되어 있다. 우리의 의식, 우리의 마음은 무엇에 관심을 두고 무엇을 하고자 하고 무엇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무엇에 관심을 두는가, 무엇을 추구하는 가이다. 그러므로 남의 재산, 남의 아내, 남이 얻은 명성을 탐내기 보다는, 오히려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사랑할만한 것을 생각하고 탐내고 관심을 두어야 한다. 또한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는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 자족하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욕구(needs)와 욕망(desire)을 구별해야 한다. 욕구는 필요한 것이 주어지면 그것으로 충족된다. 하지만 욕망은,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더 가지려는 욕심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인간은 단순한 욕구를 넘어 욕망의 실현을 무한히 추구하는 존재이다. 절대 권력과 절대 자기 보존을 위해서 재물과 쾌락과 권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열 번째 계명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첫 번째 계명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절대 신뢰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뢰가 있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맡길 수 있다면 우리는 탐내지 않을 수 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의 화목과 연합은 우리가 이웃과 화목하고 연합하는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2) 스탠리 하우어워스: 탐내다 라는 히브리어에는 강한 욕망이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우리의 질투심이 바로 그렇게 인식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 뿐 아니라 우리의 감정, 우리의 욕망의 대상-마음의 관심사들-에도 관심을 두신다. 우리는 십계명 전체의 관심사인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으며, 그 사랑이 엉뚱한 대상으로 향할 때 창조 계획과는 너무도 다른 존재로 변질된 우리 삶이 무질서한 욕망과 파편의 나락으로 떨어짐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자신의 욕망으로 가득하며,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 불안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현되지 않는 것을 갈망하는 데 있다. 우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려 한다. 청결한 마음, 곧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선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 우리의 욕망이 본질적으로 무질서하다는 것, 우리가 서로 무질서를 가르친다는 사실은 폭력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웃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우리도 마땅히 소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웃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하게 될 때 자존심이 상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합법화된 탐욕으로, 자본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합법화된 질투로 각각 일컫는데, 모두 일리가 있다. 인간의 무질서한 욕망 때문에 여자와 남자는 이제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가 되었고, 또한 가정 폭력은 에덴에서의 타락 이후 가정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결혼하고 자녀를 갖는 이유가 오로지 무질서한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데 있는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징후이다. 탐심을 물리치라는 계명은 어쩌면 외관상 탐욕에 눈이 먼 사회-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려면 탐욕이 필수 요소처럼 보이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매우 준엄한 고발이다. 교회는 꼭 필요한 것을 적당하게 원하는 법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통해 구원 얻은 우리는 무질서한 우리의 욕망에 질서를 부여해야 한다. 미래 교회는, 성도들을 무장시키고 그리스도인들이 저항하고, 교회와 교회의 교육목회야말로 죄를 치유하고 세속적 가치관에 도전하며, 그것에 대한 해독제 역할을 하는 수단의 기술을 가르치는 중차대한 과제를 떠맡게 될 것이다.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떡 한 조각, 포도주 한 모금이 우리의 갈망을 충족시켰음을 기적적으로 알게 된다.

3) 김용규: 존재론적으로 보면, 고난이란 인간 실존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신을 떠난 인간 곧 존재를 상실한 인간이 경험하는 사망의 느낌, 버림받음의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등이 고난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고난이란 존재를 떠난 존재물이라는 실존의 특정 상태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이 개념 안에는 '터무니없음' 즉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이 부조리라고 불렀던 역설이 또한 함께 존재한다. 고난은 불행과 다르다. 불행이란 행복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무엇-됨과 관련된 심리적 개념이다. 파산, 실직, 실연 등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감정이 불행인 것처럼 말이다. 불행과 달리 고난에는 반드시 그 어떤 역설적 요소가 들어있다. 즉 고난은 존재와 연결된 인간의 고통이고, 불행은 존재물과 연관된 인간의 고통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의 핵심은 언제나 '터무니없음' 곧 역설이다. 고난에는 언제나 이런 이해할 수 없음, 영문을 알지 못함, 따라서 억울하지만 속수무책임 등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에 의해, 고난에 종교적 성격이 부여된다. 어차피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고 따라서 해결방법도 없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고통스럽고 억울하기 때문에 인간을 초월한 그 어떤 존재-곧 신을 필요로 한다. 억울함을 해소시키기 위해, 아니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을 찾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오직 이것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초극하게 된다. 욥은 모든 존재물에 대한 사랑을 한순간에 버리고 곧바로 신에게 돌아갔다. 이것이 욥이 행한 자기초극이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고난에 대한 존재론적인 해결책을 제시함으로,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그리하여 안식을 얻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족이다. 자족이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만족하는 마음이다. 자족은 존재물에 대한 욕망이 충족됨으로써 얻어지는 쾌락이 아니다. 쾌락은 언제나 존재물과 연관되어 있고, 자족은 항상 존재와 연관되어 있다. 즉 존재물이 아니라 존재를 향유하려는 마음이 자족이다. 자신의 있음, 가족의 있음, 더 나아가 이웃의 있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신의 있음을 향유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자족할 수 있다.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러한 존재론적 자족을 겸손이라 불렀다. 겸손은 스스로 자신을 높여 신으로부터 돌아서게 한 교만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어거스틴의 교리체계에서 교만은 신으로부터 돌아서는 죄이고, 연이어 죄의 산물인 존재물에 대한 사랑과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겸손은 신에게 죄 사함을 받고 신에게 돌아가는 결과이고, 이어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바울이 말하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라는 자족이 존재론적 자족이요, 기독교적 겸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오직 겸손이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족을 그들의 삶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족이란 체념의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자족이란 그때마다 어느 정도 체념을 요구하며, 체념은 언제나 어느 정도 자족을 필요로 한다. 즉 자족은 체념의 긍정적 얼굴이고 체념은 자족의 부정적 얼굴일 뿐이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제9계명의 본질을 '너는 네게 있는 것에 자족하고, 네게 없는 것을 탐하지 말라' 고 파악한 것이다. 고난은 원칙적으로 인간실존의 양상이고, 자족은 본질적으로 신의 존재 양상이다. 그래서 인간의 탐욕이란 신을 떠나 자족하지 못하는 인간 곧 고난 속의 인간이 가진 너무나 당연한 욕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신의 존재양상을 닮아 스스로 자족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는 모든 고난이 사라진다. 신은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겸손 또는 존재론적 자족은 인간 자신에 의해서는 성취될 수 없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가졌으나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만이 인간 안에서 이 겸손을 성취한다. 죄 사함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자기 파괴적 탐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족할 수 있다. 인간은 뉘우침과 죄의식이라는 실존의 처절한 절망 속에서 비로소 무한한 자기 체념을 할 수 있고, 이를 통해서만 신을 발견할 수 있다. 고난이 가진 긍정적인 의미는, 고난이 없이는 인간은 종교적 단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난이 없는 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발적으로 무한한 자기 체념인 자족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고난을 체험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단지 고난을 통하여 자족과 겸손을 배우는 사람이 있거나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고난의 긍정적 의미인 자족을 배운 사람은 그 고난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불행할 뿐이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각각 당면한 고난을 단순한 불행으로 체험하지 말고, 그것의 긍정적 의미-모든 탐욕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자유와 기쁨을 향유하는 자족-를 배우어야 한다. 결국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지니라 라는 계명은 궁극적으로 '너는 네게 없는 것을 탐하지 말고 네게 있는 것에 자족하라' 라는 신의 권고인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자기의 아내에 대한 자족이겠으나, 더 나아가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서 오는 모든 고난에 대한 자족과 겸손으로 확대된다. 자족과 겸손이 있는 무한한 자기 체념을 통해서만 인간은 모든 탐욕을 극복할 수 있는 종교적 인간이 된다. 신은 종 되었던 땅 애굽에서 자신의 백성을 해방시킨 다음, 자기 파괴적 탐욕에서 다시 그들을 해방시킴으로써 존재의 자유를 부여하기 위하여, 그 실천 방법으로 자족과 겸손을 명한 것이다.
탐욕은 거짓 신이다. 하지만 거짓 신도 나름대로 신이기에 인간에게 베푸는 것이 있는데, 바로 탐욕의 대상이자 결과인 소유물이다. 소유 중심적 사회에서는 모든 소유물이 그것을 소유한 자에게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힘을 준다. 자본주의는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숭고한 가치들을 단 하나의 가치 곧 화폐가치로 환원시키는 것이 정당화되는 체제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탐욕을 떠날 수 없고, 오히려 기꺼이 더욱 탐욕스러워지길 바라게 된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황이 그리 악화되지 않았지만, 후기 자본주의에 들어오면서 금욕주의적 윤리가 사라졌다. 생산체계가 이미 완비되고,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생산성이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소비만이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이 체제 안에서는 사회적으로 탐욕을 강요한다. 지금은 경제적 요구가 생산에서 소비 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삶의 질을 높인다는 명분 아래, 노동의 윤리를 대신하여 소비와 여가의 윤리가 강요된다. 거대한 슈퍼마켓이 되어 버린 소비사회에서 인간은 소유와 소비를 부치기는 왜곡된 쾌락원칙에 사로잡혀, 열광적이고 만족스러운 상품 소비자가 되어, 사실상 자아와 자신의 존재를 상실해가고 있다. 유일한 구호는 '모든 욕망은 충족되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 모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다. 인간이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 실존적 상황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뜻이 아니다. 즉 노예가 된 인간은 죄의 결과인 탐욕 앞에서 무능하다는 것이다. 도덕적 방법으로는 탐욕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때문에 죄-사함만이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본적 방법이다. 예수는 내 안에 거하라 라며 다분히 존재론적으로 가르쳐다. 그렇게 다시 존재와 하나 되어 존재의 힘을 받으라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우상인 존재물들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4) 해석에 대한 평가: 강영안의 해석 가운데, 성경이 우리의 욕망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라는 주장은 매우 탁월한 통찰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스텐리 하우어워스 역시, 우리의 욕망 자체는 정당한 것임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한 세 명의 저자가 공통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족'이다. 특별히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교회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적당하게 원하는 법을 끊임없이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부분은 교회가 현대 사회 가운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가장 탁월하게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나 자신에게 그리고 현대 교회 가운데 아쉬운 것은, 다른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고 설교 가운데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남을 돕기 위한 재정을 준비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어떻게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 절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목회자가 구체적으로 도전하지도 그리고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현대 교회가 해야 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김용규는 특이하게, 탐욕을 고난과 연결 지어 설명하려 한다. 아쉽지만 그 연관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그 역시 자족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자족이 항상 존재와 연관되어 있다는 그의 통찰은 매우 탁월하다. 결국 자족이라는 것은, 존재를 향유하려는 마음이라는 그의 해석은 훌륭하다. 특별히 현대 사회가 탐욕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놀랍다. 후기 자본주의에 들어오면서 소비만이 자본주의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시대가 되었다 라는 그의 주장은, 사회학적인 깊은 통찰을 가지지 않고서는 쉽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이다. 다만 최종적인 적용으로, 죄-사함만이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본적 방법이라고 말하지만, 그리고 예수님의 내 안에 거하라 라는 말씀을 적용하며, 존재와 하나 됨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실제 목회 가운데, 예배와 설교 가운데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까지는 연결되지 못한다는데 아쉬움이 있다. 만약, 죄 사함 받은 것을 확신하는 성도가 여전히 큰 탐욕을 가지고 그것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이 계명에 대한 해석들을 읽고 남겨진 개인적인 질문이다.

  5) 목회에 있어 적용점: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그러나 그것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족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 자족하는 마음을 어떻게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만들어낼 것인가를 목회자는 고민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시도 가운데, 성도들에게 진지하게, 자신의 삶과 그 속에서의 자족에 대하여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들을 줘야 한다. 소비 지향적인 그리고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이 무엇인지 고민 하지 않는다. 오직 타인과의 비교만이 존재하며, 유일한 목표는 타인보다 더 부유하게, 소위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설교이든 아니면 특별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신의 소비 내용과 패턴을 점검해 보도록 하고,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즉, 남과의 비교 속에서만 젖어 살던 사람들에게, 자기 스스로를 진지하게 성찰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강영안도 그리고 스탠리 하우어워스도 동일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지적처럼 무엇을 욕망하는가이다. 김용규가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는, 자신의 소유, 즉 존재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자족하는 마음을 훈련해야 한다. 그러나 존재, 즉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추구하고 욕망하는 것을 또한 훈련해야 한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 자신이 되도록, 끊임없이 격려하고 이끌어 주어야 한다. 즉 목회 전반에 있어서, 여호와가 목자 되시고 그렇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한, 실질적인 적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지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섬세한 그 어떤 것이다. 많은 설교 가운데,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라는 추상적인 권면들은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인 삶 가운데, 하나님만으로 만족한다 라는 것을 경험하고 또한 표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만약 목회자의 삶이, 그 어떤 형태로든 존재이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존재물인 소유로 만족한다면,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을 여전히 탐하고 있다면, 이 마지막 계명은 교회 가운데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목회자에게는, 검소한 삶이 요구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하나님 한 분으로 충만한 삶이 요구된다. 목회자 스스로가, 자족하는 삶,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는 삶,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성도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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