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했습니다. '참 나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 남들은 아침 먹는게 고역이라는데,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밥 맛도 좋다니! ㅋㅋㅋ' 평상시 같으면 쉽게 넘어갔을 생각이, 이상하게도 머리에 계속 남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제 내면을 좀더 살펴보면서, 한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신앙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거룩'한 모습으로 치장한 어떤 것인 듯 합니다. '감사..' 어느 누가 나쁘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자고 주문하고 격려합니다. 그러나 그 감사 조차도 제 안에서는 죄로 작용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겉으로는 '감사'라는 것으로 포장했지만 그러나 그 내면에는, '남들과 나 자신을 은근히 비교하며, 나는 적어도 내 옆에 사람이 없는 어떤 것을 받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것은, '감사' 가 아닐 것입니다. 그저 '자기 자랑' 에 불과할 뿐이겠지요. '내가 잘나서 받을 만한 마땅한 것을 남들보다 훨씬 더 받았다' 라는 것을 '감사' 라고 치장하여 표현할 뿐입니다. 많은 것을 가진 듯 하나, 결국 복음의 신비와 정수를 모르는 자의 불쌍하고도 연약한 모습일 뿐입니다.
세상은 끊임 없이 남들과 나를 비교합니다.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진실한 핵심' 입니다. 돈으로 스펙으로 외모로 심지어 신앙으로, 모든 이들을 서열을 세웁니다. 그러나 참 신앙인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을 뿐입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그분으로 만족할 것인가, 신자는 언제나 바로 그것을 가지고 씨름합니다.
언제나 비교와 자랑과 그리고 그것의 반대 쪽 극단에 있는 절망 속에서 헤매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자기보다 못난 사람 앞에서는 자랑과 교만이, 그리고 자기보다 연약한 자 앞에서는 절망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는 결국 남들과 비교 속에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분을 사랑함으로 열심히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생의 태도 속에서만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세상의 탐욕으로 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 한분, 그분으로 만족하는 것,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분의 성실하심을 믿는 것. 바로 그 믿음이 조금더 제 안에서 자라나기를 바래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자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완벽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일하심에 실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한 삶 속에서 세상으로 부터 자유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8절)
우리는 각 세대가 그 이전 세대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학교를 갓 졸업한 소년들이 지금 갖고 있는 신념은 주로 1920년대의 신념입니다. 1960년대에 학교를 졸업하는 소년들이 갖게 될 신념은 주로 오늘날 학부생들의 신념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교육에 대한 허튼소리를 늘어놓기 시작 합니다. 우리는 현대 청소년들의 견해들을 논하면서 그것들이 마치 현대 청소년들만의 어떤 특이성에서 저절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은 이제 중년이 된 지난 세대의 청소년들이 교실을 장악하면서 뒤늦게 남긴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많은 교육 계획들이 실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세대가 갖지 못한 것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각기 원하는 대로 교과 과정을 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겹도록 계획을 세우고 보고서를 작성해도, 우리가 회의적이면 학생들에게 회의주의를 가르칠 것이고, 우리가 바보라면 어리석음만을, 저속한 사람들이라면 저속함만을, 성자들이라면 거룩함을, 영웅들이라면 영웅적인 태도를 가르칠 것입니다. 교육은 각 세대가 다음 세대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 통로 중에서 가장 의식적으로 사용되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것은 닫힌 체계가 아닙니다. 교사들에게 없는 것은 학생들에게 흘러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어를 모르는 사람이 학생들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냉소주의와 환멸의 시기에 정신이 형성된 사람이, 희망이나 불굴의 정신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역시 이와 똑같이 분명합니다. (중략...)
사람들은 교육이 핵심 거점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 말은 완전히 틀리기도 하고 더없이 옳기도 합니다. 그것이 기존 학교의 운영에 간섭하고 교과 과정을 바꾸는 식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라면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 교사들은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게 가르칠 것입니다. .그런식의 교육 '개혁' 은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업무량을 늘려 줄지는 몰라도, 그들의 총체적인 영향력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교육 계획은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포도나무에서 떫은 배를 불러내는 마법의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풍성하고 물기가 많고 열매가 많이 달린 나무는 달콤함과 힘과 영적 건강을 낳겠지만, 메마른 가시투성이의 시든 나무는 증오, 질투, 의심, 열등의식을 가르칠 것입니다. 가르쳐야 할 내용을 아무리 일러 줘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의식도 못한 채 하루 종일 생긴 대로 가르칠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의 핵심 거점이라는 말이 지금의 성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그들 주변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직접적인 하위 기독교적 견해와 덕목,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플라톤이나 베르길리우스 같은 풍성한 고전 사상을 보급시켜 장래에 교사가 될 사람들의 유형을 바꿔 놓는 일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 후손들에게 가장 큰 유익을 주는 일이라는 뜻이라면, 그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 피고석의 하나님, C. S. 루이스 144p-147p
13년 전, 갖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에게, 성가대 혹은 교육 부서라는 교회를 섬기는 두가지 선택이 주어졌습니다. 원래 찬양을 좋아했기에 성가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기특하게도 제 마음에 한가지 중요한 생각을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이만큼 자란데에는 교회 선생님들의 큰 수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이라도 그분처럼 섬겨야 하지 않겠는가?' 처음에 들어간 곳은, 지금의 장인어른이 부장선생님으로 계셨던 초등부였습니다. 아직도 분반공부 시간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다섯 명의 너무나 귀엽고 소중한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과 작은 방에 함께 모였습니다. 아이들은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다섯 명이 동시에 저에게 말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어설프고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시작했던 제가, 교사로 그리고 이 후에는 교육 전도사로 강도사로 목사로 거의 10년 이상을 교육 부서에 속해 있습니다.
조금씩 나이가 들 수록 드는 생각은, 교육은 절대로 단순하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이라는 존재가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마치 초등학교 백과사전식으로 이것저것 수 많은 과목을 정해놓고 균형있게 가르치기만 하면 교육의 완성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다만 저 역시 자라고 있기에 또한 이곳에 배우러 왔기에,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책을 보고 조금씩 정리해 가고 있는 수준입니다.
제가 루이스의 이 글을 읽으며 무릎을 쳤던 부분은, '교육의 유전' 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이 '유전' 이라는 부분은 단순히 교육의 영역에 한정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대부분의 현대적인 교회는, 마치 자신이 역사 가운데서 동떨어진 것 처럼, 좀더 쉽게 말하면 자신의 교회가 역사상 유일한 교회인 것처럼 기독교의 역사와 유전 안에서 분리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육부서를 섬기면서 늘 속으로 아쉬웠던 부분은,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대부분 자신의 자녀들의 문제를 마치 '남의 문제' 처럼 여기는 부분이었습니다. 차마 말은 하지 못했으나 제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것은, 부모님의 성격 태도 그리고 신앙이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수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새침하고 못된 성격이라면, 아이 역시 그러한 성격을 교회에서 나타내는 것을 여러번 목격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책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느새 교육이라는 것이 세대간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고, 유산적인 성격이 굉장히 강한데, 그것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는 해결책은 '교회가 그들에게 바른 것을 가르치라'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일주일에 겨우 두시간이라는 최소한의 시간에,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물론 이러한 상황은 대부분의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의 생활, 아이들은 이미 사교육을 받고 저녁 늦게 들어옵니다.)
이제 첫 아기를 기다리는 제가, 부모가 아이들의 교육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상투적인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의식만은 꼭 함께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은 '우리'로부터 '영향' 을 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부모 혹은 어른으로부터 '분리'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은 루이스가 이야기하는 것 처럼 '사실' 부모의 문제, 혹은 그 세대의 문제가 틀림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문제 의식을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녀들의 교육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는 부모를 제외해 버린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지성씨의 '리딩으로 리드' 하라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부모님들이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고전 독서를 하라고 강요를 할 경우, 아이들은 거부감을 느끼고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늘 성경을 목숨걸고 보시고 기도하시는 그리고 눈물로 남을 사랑하는 어머니, 이것이 어쩌면 지금의 제가 배운 신앙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태도와 신앙의 모든 모습들은 언제나 우리의 후세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부모로서, 우리가 언제나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힘든가요? 너무 바쁘고 힘들고 할 일이 많아 잠시 뒤로 물러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영향력이 그대로 그들에게 간다는 문제 의식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진정 다음 세대에 좋은 영향력을 남기고 있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갈고 닦아야 합니다. 가장 단순한 이야기지만,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안일하게 교회에 위탁하거나 학원에 위탁해서는 안되며, 우리 자신이 먼저 앞장서야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자라나는 세대와 함께 성경을 읽고, 위대한 책들을 읽고, 함께 이야기하고, 모여 손을 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모두가 함께 사는 유일한 길이기 떄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행복, :)
고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의 자율학습 시간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 자율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가지로 곤욕이었습니다. 역시나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더위' 였습니다. 혈기 왕성한 남자 학생들이, 겨우 몇대의 선풍기가 돌아가는 좁은 교실과 책상 속 (왜 그렇게 학교 책상은 사이즈가 작을까요?) 에서 공부하라는 것은, 뜨겁운 형벌이 영원히 지속되는 지옥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 인생과 실제로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희망은 있었습니다. 뜨거운 여름의 시원한 수박 한입처럼, 언제나 고급 수준의 독서를 지향하는 제 친구가, 동네 서점에서 '무협지'를 빌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때,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무협지를 읽었습니다. 다소 변명처럼 느껴지시겠지만, 그때의 더위는 하물며 무협지를 읽기에도 무리였습니다. :)
흥미로운 것은, 하루만에 한 시리즈를 다 봐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는지 몰라도, 늘 제 친구는 3권이 완결인 무협지를 빌려왔습니다. 아침 1교시에 첫권을 시작하여 기승전결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짜릿함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가 기억하는 무협지의 일반적인 공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등장 => 재난 => 원수가 생김 => 원수에 대한 1차 도전 => 처절한 실패 => 큰 상처를 입고 깊은 계곡 등지에 떨어짐 => 동시대가 아닌 최소 200년 이상 전에 이름을 날렸으나 놀랍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무림의 '기인' 을 만남 => 기인의 무공 전수 => 원수에 대한 2차 도전 => 승리
어쩌면 이 때부터 제 머리 속에, 아니 제 영혼 속에 새겨진 단어는 '기인' 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탁월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혹 주변에 그런 책이나 사람이 있다면 절대 놓치지 마시길) 답답한 나의 재능의 수준에서 한단계 도약할 수 있는 가르침과 지도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기독교를 '배움'의 차원으로 접근한다면, 저는 모든 이들에게 '기인' 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는 결코! 배움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 부분에서 한가지, 오늘 작은 나눔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설교에서의 적용' 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모든 목회자에게 있어 '적용' 이라는 것은, 가장 큰 골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목회자의 설교라는 틀은 이렇게 구성 됩니다. 성경 해석 혹은 주해 =>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원리 발견(대부분 law의 관점에서 접근) => 그 원리를 적용할 영역(field) 찾음 => 우리는 그렇게 해야한다 라는 주장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식적인 틀은 말 그대로 식상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식상하다고 해서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좀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런 방식의 설교와 적용은, 제 소견으로는,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에서 팀 켈러는, 어떤 의미에서 식상한 틀 안에 갖혀 있는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좋은 통찰력을 줍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팀 켈러는, '서양의 박영선'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글을 먼저 인용해 봅니다.
The main problem, then, in the Christian life is that we have not thought out the deep implications of the gospel, we have not "used" the gospel in and on all parts of our life. Richard Lovelace says that most people's problems are just a failure to be oriented to the gospel--a failure to grasp and believe it through and through. Luther says, "the truth of the Gospel is the principle article of all Christian doctrine... Most necessary is it that we know this article well, teach it to others, and beat it into their heads continually." -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modern world.
핵심은, '복음을 모든 영역 속에 철저하게 적용해야 한다' 입니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모든 영역' 과 '철저' 입니다. 그래서 팀켈러가 사용한 think out 이란 숙어가 굉장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고안해 내다, 궁리해 내다, 숙고하여 해결하다' 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요. '복음을 모든 곳에 철저하게 적용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부터 팀켈러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그의 접근, 복음을 적용하는 관점에 있어서 예를 들어 봅니다.
Approach to one's family. - Moralism can make you a slave to parental expectations, while pragmatism sees no need for family loyalty or the keeping of promises and covenants if they do not "meet my need" The gospel frees you from making parental approval an absolute or psychological salvation, pointing how God becomes the ultimate father. Then you will neither be too dependent or too hostile to your parents. -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modern world.
그의 설교의 적용까지 가는 관점을, 그의 글을 통해 제 나름대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이 어떤 철학 혹은 생각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지에 대한 분석 (위의 글에서는 도덕주의와 실용주의를 사용했습니다) => 그것이 성도에게 혹은 사회에 어떻게 악하게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 (위의 글에서는, 도덕주의 안에서 사람은, 부모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생기며, 실용주의 안에서 사람은, 가족이 나에게 가치가 없다면 가족을 버린다는 관점으로 파악했습니다) => 복음은 왜 그것에 대해서 대안이 되는지에 대한 대안 제시 (위의 글에서는 하나님께서 완벽한 아버지가 되시기에, 우리 자신의 부모의 허락만 절대적으로 여기던 연약한 인생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설명합니다) => 실제적 삶에서 복음의 적용점 정리 (결국 복음 안에서 크리스천은 부모에게 너무 의존적이지도 혹은 적대적이지 않게 된다.)
팀켈러의 통찰이 너무 놀라워 어안이 약간 벙벙한 상태이지만, 제 개인적으로 이러한 '적용의 방식'에 대한 관점에 대해 생각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세상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흐름과 인생의 흐름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행동들에 대해서, 엄청난 분석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을 보며 행동을 고치라 라는 접근이 아니라, 그 행동의 내면의 동기와 살핀다는 것입니다!(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물론 그것이 결론적으로는 어떠한 주의(ism)으로 분석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우선적인 문제는, 목회자의 영혼과 마음 안에,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단 하나의 사실도 놓치지 않는 예리한 관찰이, 그리고 그것의 원인을 밝히고자 하는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복음이 실제로(혹은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현재 속에서) 그러한 행동 혹은 문제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이 단순히라는 표현이 오해되지 않기를 바라며) 복음이라는 것이 죄 사함이다 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혹은 아쉽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팀켈러의 이 말은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All of life is repentance--not just for sins, but also for our false "righteousness(es)"
- any failure of actual righteousness is always a failure to live in accordance with our imputed righteousness. We make something besides Jesus our real hope and life. So believing the gospel means to repent, not just of our sins, but of the particular (self) righteousness(es) underlying our behavior. That is the secret of change. -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modern world.
다시 풀어서 그의 말을 적어보자면, 실제의 인생에 있어서 실패는, 참 소망되시는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의로움들을 의지하게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의 근본 혹은 기초가 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의 회개란 단순히 우리의 죄 (예를 들어 십계명을 범한 죄) 에 대한 회개만이 아니라, 우리의 깊은 내면 속에 있는 나의 우상들 (예를 들어 자기 확신, 돈과 명예를 의지함 등등) 을 회개하는 것 까지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결국 성도의 그 행동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그의 설교를 이끌어가는 논리는 이러한 식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정리(심리적이고 사회학적인 틀을 자유자재로 사용) => 충분히 확장된 복음을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적용 => 결국 인간의 내면과 사회의 밑바닥의 숨겨진 곳에서 부터 변화를 꾀함
결론적으로, 제 스스로를 위해서 정리하며 다시 한번 반복한면 이렇습니다. 결국 팀켈러처럼 폭 넓고 적실(適實)한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와 인간의 내면까지 분석할 수 있는 엄청난 분석력과 지혜가 필요하고, 그리고 단순히 다음 세상을 향하는 복음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현재적으로 활동하는 복음에 대한 이해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이만큼 정리했으니 이제 한숨 돌립니다.
그리고 이제 기도하며 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봅니다.
'주님, 그렇다면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합니다.
언제나 목회와 설교는,
제가 상상하던 그 이상의 어려움이고,
완전히, 제 능력의 바깥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경험합니다.
혼란, 당황, 절망 이것이 저의 솔직한 내면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목회자들 가운데, QT(quiet time)에 대한 두가지 입장이 있는 듯 합니다. 조금 의외이시겠지만, 하나는 유용론(有用論) 이라면 하나는 해악론(害惡論) 입니다. 유용론에 선 분들은, 성도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에, 비록 개인적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QT를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보통 유용의 반대는 무용이지만, 그러나 적어도 QT에 있어서는 무용론의 반대는 해악론의 입장입니다. 그분들의 주장은, QT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해석 그리고 지나친 적용 중심의 방법이기 때문에 무용할 뿐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해로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두 가지의 조금 다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좋을 듯 합니다. 첫째로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QT는 그렇게 나쁜 방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완벽한' 성경 해석은 없다는 점에서 말하고 싶습니다.(이 부분에서 제 의도가 오해될까 두렵지만) 물론 '이론적'으로는, 특정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본문의 의도를 찾아내는 것이, 개혁주의 설교 안에서 핵심이며 저 역시 그 방향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목회자가 동일 본문에서 동일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그의 책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에서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그 오직 성경이라는 것이 성경 해석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생각에는, 큐티하는 사람의 자의적인 해석 때문에 QT를 막아야만 한다면 그것은 이유가 부족하다고 봅니다.
둘째로, 적극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도의 신앙 성숙을 위해서 QT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개혁주의 교회의 롤모델로 알려진 뉴욕 리디머 처치((Redeemer Church)의 팀 켈러 목사님의 글을 인용해 봅니다.
This definition assumes that every text has both a 'micro' and a 'macro' context, To understand any particular text of the Bible, we must fist put it into the 'micro' context--its historical and linguistic setting, in order to discern the immediate intent of the human author. But every Biblical text also has a 'macro' context--its place in the entire Bible which has as its purpose the revelation of Christ as the climax of all God's redeeming activity in history. We must not only ask : 'what did the human author intend to say to his historical audience?' but also 'why did God inscipturate his as a way of pointing to the salvation of his Son?' -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modern world 중에서
팀켈러 목사님이 설교에 있어서 주장하는 핵심은(저는 이것을 저를 포함한 모든 성도에게 동일한 원리로 이해합니다) 성경에 접근하는데 있어 두가지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미시적 관점(micro)이고 하나는 거시적 관점(macro)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두가지 관점이 적절하게 갖춰져야만, 좋은 설교 (성도에게 적용하자면 본문에 대한 접근 혹은 묵상) 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를 포함한 많은 성도님들은 실제로 성경을 거의 보지 않습니다.(어쩌면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스스로 아주 작은 크기의 본문에 대해서도 읽어본 적도 고민해본적이 없는데, 수동적으로 교회에 앉아, 단순히 구속사적 관점, 혹은 개혁주의적 설교를 듣기만 한다고 성도가 성숙해지고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정말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짓는 화려한 집과 같습니다. 나는 그래도 안전하다는 일종의 자기 최면과 같습니다.
오히려 성도 스스로 미시적 관점의 본문 접근을 훈련하고 쌓아 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큐티를 권장하되, 오류가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은 거시적 관점 안에서 잡아주고 도와주는 것 (좋은 책에 대한 소개와 함께 공부하는 것) 이 목회자의 역할이라 생각됩니다.(물론 모든 목회자가 염려하듯이, 제가 이해할 때 대부분 이단에 빠지는 분들은, 미시적 관점에 집착한체 거시적 관점을 배우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인 듯 합니다)
영화 '루터' 에서, 루터를 향한 추기경의 분노에 찬 말 속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건 불법이다! 여느 사제가 읽기에도 성서는 너무 난해하다.
That is outrageous! The Scriptures are too complex for even the average priest to understand
하물며 일반 대중이라니!"
much less the common man!
현실에 대한 분노와 답답한 마음을 늘어 놓자면 끝이 없지만, 그러나 저의 인생을 분노로 낭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묵묵히 미래를 준비하는 것만이, 저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인 듯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씁니다. '자립하는 신앙인으로서 사회 속에 세워지는 교회'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 주님께서 은혜와 지혜를 주시기를.. 그래서 행복,
그러면 일과 삶이 통합되었던 (미국의) 식민지 시대에 가족간의 관계는 어떠 했을까? 우선 남편과 아내가 날마다 나란히 함께 일했으며 동일한 경제적 기업을 공유하고 있었다. 한 역사가는, 식민지 시대 여성의 경우 결혼은 '남편 옆에서 동역자가 되어 ... 도살, 은세공 작업, 인쇄, 의자의 천 갈이 등 남편의 일에 필요한 기술이면 무엇이든 배우는 것을 의미했다' 고 말한다. 중략...
식민지 시대에는 남편과 아버지가 집안의 머리로 간주되었는데, 여기서 머리됨의 의미도 매우 구체적으로 정의되었다. 즉 그것은 자기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집안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의무를 부여하는, 신적으로 재가된 직분으로서 정의되었다. 중략... 그는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도록 요구받았다. 남편과 아버지는 개인적 야망이나 자기 이익에 좌우되어서는 안되고 온 집안의 공동선을 위해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중략...
일상 생활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일과 자녀 양육의 책임에 통합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가정을 중심으로 생산적인 일이 수행되고,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일하는 법을 훈련했기 때문에, 그는 '하루하루, 해마다 눈에 보이는 존재' 였다. 아버지의 역할은 직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시작되는 별개의 활동이 아니라, 하루 일과에 속한 불가결한 일부였다. 역사 기록을 보면, 자녀 양육에 관한 식민지 시대의 문헌 - 설교와 자녀 양육 지침서 같은 - 이 요즈음과는 달리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주로 아버지를 대상으로 했다. 아버지가 일차적인 부모로 간주되었으며, 자녀의 종교적 지적 훈련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중략...
'남자들은... 부엌에서 일하는 것을 여성만큼이나 편하게 느꼈는데, 집안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살림살이를 꾸릴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요리와 가사에 관한 책들이 일차적으로 남자들을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들은 손대접에 신경 쓰는 만큼이나 실내 장식에도 열심이었다.' 중략...
이 모든 것이 산업 혁명과 함께 바뀌었다. 중략...
가장 자명한 변화는 남자들이 거의 선택의 여지없이 가정과 들판을 떠나 일을 좇아 공장과 사무실로 가야 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집안에 늘 있던 남자들이 급속히 사라져 버렸다. 중략...
그 결과, 19세기 중반에 출간된 자녀 양육 지침서에는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자녀 양육에 관한 설교와 소책자가 처음으로 아버지나 양친 부모가 아니라 순전히 어머니만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다. 이제 남자는 일차적으로 아내를 통해서 자녀들과 연결된다고 느꼈다. 중략...
자녀 양육에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은 과거에 집안의 다른 어른들 - 조부모, 독신인 친척, 나이 많은 형제, 하인, 특히 아버지 - 과 함께 그 과업을 나누던 때보다 더 두드러진 양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어른들이 집을 떠나 일터로 가게 되자,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 순전히 어머니의 책임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여성은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급격히 감소하는 것을 경험하는 한편, 동시에 여전히 남아 있는 소수의 일에 대한 책임은 극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경험했다. 중략...
새로 등장한 산업 자본주의 세계는 덕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보급시켰다. 자본주의 세계는 각 사람이 개인 대 개인으로서 다른 이들과 경쟁할 것을 요구하는 듯 보였다.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는 자기 이익과 개인적 야망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이 적절하고, 심지어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중략...
그러한 경향은 가정에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었다. 결국에는 식민지 시기의 가치관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졌다. 청교도들은 '정열' 을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것이므로 공공선을 위해 통제하고 억제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이르면, 남자의 '정열' 과 자기이익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고 평등과 경제적 번영의 근원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중략...
그리하여 공 / 사 의 분리는 남녀 간의 뚜렷한 대비로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MIT 대학의 케네스 케니스턴은 이렇게 쓰고 있다. '가정은 특별히 보호된 장소요, 부드럽고 순수하며 관대한 정서(어머니 안에 구현된)의 저장소이며, 노골적이고 경쟁적이며 공격적이고 이기적인 상업의 세계(아버지로 구현된)를 막는 요새요 보루가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역전이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남편과 아버지가 가정의 도덕적,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도록 권유받았다. 그러나 이제 남성은 선천적으로 거칠고 잔인하며 아내에게서 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한다. 중략...
이것은 이중 잣대의 기원인데, 겉으로는 여성에게 능력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어쨌든 그들에게 덕의 집행자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저변에 깔린 역학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로툰도가 설명하듯이, 본질적으로 미국은 남성을 덕스러운 존재가 되어야 할 의무에서 풀어 주었던 셈이다 .처음으로 도덕적, 영적 지도력을 더 이상 남성적 특질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여성의 일이 되어 버렸다. 중략...
미국 교회는 대체로 남성다움이 재정의되는 것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수세기 동안 남편과 아버지가 가정의 머리된 직분으로 신적 소명을 받았다고 가르쳐 온 교회가, 이제는 대상을 바꾸어 주로 여성에서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중략...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2대 1의 비율인 경우도 많았다. 중략...
많은 성직자가 공적 영역에서 변호될 수 있다는, 종교에 대한 인지적 주장을 펴는 데서 후퇴하고 말았다. 그 대신, 그들은 신앙을 경험과 감정이 속한 사적 영역으로 옮겼으며, 따라서 그것은 여성의 관할구역 아래로 들어갔다. 중략...
요컨데, 교회는 남자들 사이에 퍼져 가던 세속주의 풍조에 도전하기보다 대체로 그것을 묵과하고 여성을 향해 돌아섰던 것이다. 성직자들은 종교가 여전히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는 영역이 하나라도 남은 것에 안심하는 것 같았다. 가정이 바로 그런 영역이었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은 아버지가 자녀교육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던 데 비해, 1800년대 초 '뉴잉글랜드 목사들은 '어린이의 취향과 정서와 습관' 을 형성하는 데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자신들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열렬히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 결과 '어머니들이 예전에는 아버지들의 일이었던 가정기도 인도를 점차 떠맡게 되었다.' 중략...
하지만 궁극적으로, 여성을 남성의 도덕적 개혁자로 만들려는 시도는 자기 파괴적인 것이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덕이라는 것이 인간의 자질이 아니라 여성의 자질로 정의될 경우, 남자에게 덕스럽게 되라는 것은 결국 여성적 표준을 강요하는 셈이며, 그런 표준은 남자의 본성에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덕스럽다는 것은 남자답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으로 되는 것을 의미했다. 중략...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근대성의 풍조를 먼저 흡수한 데 비해, 사회적 개혁운동은 대체로 여성의 주도하에 (성직자의 후원을 받으면서) 이뤄졌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공적 영역을 도덕으로 재무장시키고 남성을 전통적 가치관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노력이 여성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것이다. 중략...
남자들은 재도덕화의 시도를 '여성적' 가치관의 강요로 인식했으며, 그것에 정하아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남성이 종교와 가정에 반항했고, 그로 인해 종교와 가정은 모두 평가절하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되었음에도 일부 사회비평가들이 남성을 고분고분하게 '길들일'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다. 중략...
그러나 미국의 역사 기록은 이런 접근이 실효가 없음을 보여준다. 오직 남성들 스스로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되는 것이 남자다운 모습이라고 확신할 때에만 남성들이 가정 생활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이 사실이다. 즉 부모로서의 의무와 희생이 남성적인 가치라는 것, 부부 간의 사랑과 정절이 바깥에서 남성에게 강요된 여성적 표준이 아니라 남성적 성품의 불가결한 측면 -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그 무엇 - 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 완전한 진리, 낸시 피어시 601-631p 발췌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 녹녹한 일은 아닙니다. 어떤 단편적인 것들을 들어 하나하나 열거하여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어떤 역사적인 흐름 안에서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끈질기게 추적하여 알아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훌륭한 책을 읽고 배우는 것은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이제 거의 마무리해가는(어쩌면 이제 새롭게 다시 읽어야 하는) 완전한 진리를 들춰보면서, 미국의 역사 가운데 가정 속에 일어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의 변화에 대해, 소중한 관점을 배웁니다. 물론 산업 혁명의 부작용 (남편을 가정에서 빼앗아 가 버린) 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이 책에 나와있지 않습니다.(저자는 그 영역은 이 책에서 다룰 부분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비록 미국의 역사적인 맥락을 조명했지만, 한국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권위와 책임을 잃어버린 가장, 모든 가정의 책임을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방관해 버린 채, 외부적인 생업에만 몰두할 수 밖에 없는 서글프고도 악한 남편의 모습이 사실은 저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제가 이해할 때에는, 한국 교회의 부흥은 여성들의 헌신과 노력 (저의 어머니와 장모님을 포함하여) 에 뿌리박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 그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낸시 피어시가 주장하는, 결국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가 도망하여, 가정이라는, 그리고 여성이라는 영역안에만 존재하고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가슴이 덜컥합니다.
세상에 쉬운 것은 하나도 없는 듯 합니다. 그래서 고민해야겠지요. 저는 목회자이기 이전에, 남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입니다. 요즘에 정말 많이 언급되는 '가장됨' 의 진정한 회복은, 단순히 가정을 사랑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끝날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언제나 그 최종적인 목표는, 참되고 성숙한 기독교인 남성을 양육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구체적인 각론들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교회 가운데, 이런 고민과 성찰에 대한 나눔과 도전이 언제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께서 세우고 요구하시는 참된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마땅히 가장이 갖추어야 할 덕과 신앙을 갖춘 가정의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이런 경험이 기독교 세계관을 개발하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상을 공부하고 그것에 관해 논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죽고 다시 부활하기 위함이다. 이 같은 내면의 영적 실재가 없으면, 우리가 세계관과 관련하여 이제까지 말한 모든 것이 하나의 정신적 운동에 불과할 것이다. 기껏해야 지적인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이거나, 더 나쁘게는 똑똑하고 아는 것 많은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비치는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교양 있고 세련된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기 위해 미사여구를 늘어 놓고 특별한 언어를 구사하며, 몇 개의 인상적인 인용구를 반복하는 것은 사실 누구든지 배우기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세계관 연구마저도 우리의 지성을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복종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자만심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면, 그것이 구체적인 삶과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지 않고 순전히 추상적 개념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타당성 구조' (plausibility structure)라 부르는데, 이는 사상이 구체화되는 실질적인 맥락을 가리킨다. 교회가 바로 복음이 구현되는 '타당성 구조' 인 셈이다. 사람들이 눈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 사랑과 능력과 선과 같은 초자연적 차원을 목격할 경우에,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우리의 메시지가 비로소 타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중략...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데리고 가야 할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그것이 신체적 고통이든 심리적 고통이든, 우리가 진정 무엇을 우리 인생의 토대로 삼고 있는지를 보게 하는 방법은, 그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이나 가족, 일이나 평판을 잃을 경우, 우리의 삶은 무너지고 극도의 상실감과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목적의식과 정체감이 얼마나 깊이 그런 것과 연관되어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앗아가시도록 기꺼이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죽고 싶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원리가 너무 부정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기독교 내에는 거룩함이 마치 재미와 즐거움을 거부하는 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아주 엄격한 금욕주의의 흐름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죽음은 그와 같은 금욕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상으로 도피하는 수도원주의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비록 고통이나 값비싼 대가가 따르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배신이나 억압으로 우리의 마음이 찢어질 때 그분께 울부짖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품게 하거나 혹은 타인을 공격하게 한다면, 꽉 움켜쥔 손을 펴서 내놓는 것이다. 불가항력의 악을 직면해서도 순전희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본 - 배척받고, 죽임 당하고, 살아나는 것- 에 스스로를 굴복시킬 때, 그분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시리라고 속삭이는 조용한 기도다. - 완전한 진리, 낸시 피어시 651p-663p 발췌
화려하고 정교한 지식 자체에 대한 탐욕이
나를 사로잡지 못하기를,
그 지식과 이성의 길 끝에서
결국 하나님께 무릎 꿇는 삶이 되기를,
십자가와 연합하여 고난 받는 인생이 되기를,
결국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 드러나는 인생 되기를,